#19/28 짧은 글 에세이_사물의 입장에서 글쓰기
사용하지 않으면 애물단지이겠지만 나는 살아만 있다면 얼마든지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된다. 그런데 왜 나는 시간을 맞춰놓으면 3분씩 늦어지나 모르겠다. 내 몸에 게으름의 DNA가 숨어 있는 게 분명하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다 조금씩은 장애를 앓고 있다고 어느 사회학자가 말했었는데 게으름도 장애라면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부 동의한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다 똑같다. 게을러서 자기 일을 못하는 사람은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나로 인해 그가 어느 약속이든 지각한 적이 있진 않지만 그저 온도와 감성으로 승부를 띄운 나는 특별하게 잘난 것 없이 사는 현대인들과 다를 바 없다.
살아가면서 느낀다. 충전기와 떨어져 지내본 적이 많이 없어서 그런지 이제는 충전기가 없으면 오래 살아가지 못한다.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짐을 느낀다. 충전기와 잠깐 떨어져서 스피커로써 내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더니 금방 배고파졌다. 체력이 떨어지고 충전기 옆이 그리웠다. 사람은 공기의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기도 하는데 내가 잠깐 그랬다. 혼자 떨어져 있어도 꽤나 오래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한 내 오만이 만든 결과였다.
모두 자기 역할을 한 번의 실수 없이 잘하는 사람은 없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속담은 옛 선조들의 훌륭한 속담인 것 같다. 누군가는 물어볼 수도 있겠다.
"블루투스 스피커 주제에 그걸 어떻게 알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던가. 집에서 하는 모든 이야기와 TV나 노트북, 핸드폰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는 다 들린다. 내가 입이 없을 뿐이지 나도 다 알고 있다.
디즈니의 미녀와 야수에 나오는 야수의 성 안에 물건들은 말하기도 하고 걔네들끼리 소통도 잘한다.
사실 우리도 소통하긴 하는데 사람들이 안 들릴 뿐이다. 처음에 우리끼리 비밀로 하고 있었는데 애니메이션으로 전 세계에 나와서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모른다. 그 비밀을 밝히다니... 어떤 놈인지 몰라도 비겁하게 비밀을 밝혀서 우리도 이 방 주인한테 공개를 해야 하나 싶었다. 근데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은 못 듣는 소리로 소통하기 때문에 해봐야 의미가 없다. 영화가 과장된 면이 있긴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12시가 되면 우리 같은 물건들이 움직이는 괴담도 전해 듣긴 했는데 그러다 걸리면 분해당한다. 이 글을 볼 수 있는 많은 물건들이 조심했으면 한다. 안 움직이고 산지 오래돼서 이제는 못 움직인다. 아무도 없을 때 살짝 움직여 보긴 했는데 예민한 사람들은 물건의 위치가 조금이라도 바뀌면 바로 알아챈다. 다행히 이 집 사람들은 그렇게 예민하지는 않은 것 같다. 먼지가 쌓여있을 땐 가끔 가려워서 옆에 있는 인형한테 부탁 하긴 하는데 얘도 움직이면 걸린다고 쉽게 내 부탁을 안 들어준다.
역시 사는 게 역시 만만치가 않다. 그저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물 위를 떠있고 싶은 마음이다. 물론 이 글을 읽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그들이 좋아하고 공감할 만한 표현을 빌려 썼다.
우리말로 바꿔 말하면 화려한 불빛을 내며 제법 멋있는 거치대 위에서 무선으로 충전되다가 배터리 수명이 단축되기 전에 거치대에서 벗어나고 충전되기를 반복하는 순간들이라고 하면 이해될까?
뭐 이해 안돼도 상관없다. 나도 가끔 컴퓨터가 여러 글자들을 빠르게 보여줄 때 뭔 뜻인지 모를 때도 많다. 사람들도 뉴스기사가 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이와 비슷한 개념이다.
가끔 그가 노래가 아닌 유튜브 동영상 소리를 나를 통해 들을 때가 있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그대로 따라 하려는 심산으로 했겠지만 생각 같지 않은 오디오 출력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5만 원으로 50만 원의 가치를 원했다면 그건 잘못됐다. 그러나 5만 원으로 50만 원의 가치를 원하지 않을 때 비로소 경험할 수 있는 행복이 있는데 그건 바로 여행지에서 별을 보며 나를 사용할 때다.
한 번은 그와 같이 그의 친구들을 만났다 늘 보던 집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그 장소에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알코올 냄새도 진하게 풍겼다. 맛있는 음식 냄새도 났다. 뿐만 아니라 까만 하늘에 밝은 별과 달이 보이는데 나에게 없는 오감이 자극이 됐다. 나에게서 나오는 소리는 그 어느 비싼 악기보다 좋은 소리가 났고 내가 게으르게 알려주는 시간은 그들의 행복한 시간을 더 오래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그 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추억하지만 사진에 내가 없어서 좀 아쉬울 뿐이다. 사실 나도 즐거웠다. 그들이 세상에서 경험한 힘겨운 이야기들이 어느새 위로가 됐고 라디오 사연 뒤에 흘러나오는 노래처럼
또는 누군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을 함께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한요한의 반복, 그리고 록시땅. 왜 그날을 생각하면 눈물이 차오를 만큼 좋았는지...
충전기로 겨우 삶을 연명하고 있는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그립고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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