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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온 Jun 12. 2024

지갑

#15/28 짧은 글 에세이_사물의 입장에서 글쓰기

즘 사람들은 현금을 잘 쓰지 않는다. 카드를 많이 쓰는데 그것도 이제 한 물 가나보다. 바깥공기를 마셔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이니 이제는 내가 꽤나 도태된 

존재이려나. 




 요즘엔 다 삼성페이, 애플페이 같은 폰 하나만 있으면 뭐든 결제할 수 있는 세상으로 변했다. 그래, 나 같아도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결제되는 세상에서 굳이 카드 지갑도 아닌 반지갑을 사용한다는 건 비효율적인 짓이지.

 나는 선물로 그에게 다가갔지만 집에 모셔서 있고 보통 카드 지갑을 들고 다니는 주인은 그마저도 잘 들고 다니지 않는 상황이다. 나는 반지갑이다. 그것도 나름 준명품라인에 속하는데도 짐짝 취급이다. 옛날에는 잘 들고 다녔는데 쓰고 있지 않으니 차라리 날 많이 사용하는 다른 주인에게라도 팔면 좋겠지만 또 그건 싫은가 보다. 그래도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게 지갑 아니겠냐면서 안 팔고 있다.

 오래되긴 했지만 아직 뻣뻣한 가죽과 카드집은 카드가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거나 하지 않아서 늘어난 부분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흠집도 잘 나지 않는 재질이기에 잘 닦아서 새 상품처럼 포장하면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음... 뭐랄까, 관상용 지갑이라는 생각이 든다. 집에 있는 진열대나 보관함에 직접 신지 않지만 마이클 조던이 신던 조던 농구화를 전시해 놓는 사람의 이야기를 본 적 있다. 턱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비싸게 산 신발인데 한 번도 신지 않고 그대로 모셔와(?) 집에서 보관하는 이해 못 할 짓을 그가 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마이클 조던이 직접 신던 농구화의 값어치가 있진 않지만 쓰지 않을 거면서 고이 모셔두는 것만큼은 똑같다. 전 여자친구가 선물해 준 지갑이라서 안 팔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된다. 언제 받았는지 정확하게 기억도 못 하는데 아마 4년 전인 그가 25살 생일이 되던 날이지 않나 추측을 해본다.

 

 평소에는 잘 열어보지 않지만 가끔 로또를 사면 나에게 보관한다. 일주일 동안 집에 묵혀놨다가 별 긴장감 없이 로또를 꺼내기 위해 나를 찾는다. 내가 있는 위치는 여행용 가방 옆쪽 지퍼에 있다. 거기가 아니라면 거울 앞에는 항상 내가 보관되어 있다. 오늘 그의 눈에 띄어서 이렇게 글의 주인공이 됐으니 아마 조만간 바깥 구경을 하지 않을까 싶다. 그는 로또 사는 날이 아니면 나를 신경 쓰는 일이 많이 없다. 


 벌써 2024년 여름이 됐다. 봄 시즌에는 코로나로 인해 결혼이 밀려 있던 사람들이나 때가 되어 결혼하던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의 지인 중에서도 결혼하는 사람이 꽤 있었다. 결혼식 축의금을 현금으로 뽑아서 줘야 하는데 마침 나에게 현금이 들어있었다. 모처럼 그가 나를 다시 집어든 날은 기분 좋았다. 봄 날씨가 진짜 좋았다고들 한다. 아무리 지구온난화가 찾아왔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4계절이 뚜렷한 한국에서는 봄을 즐기기에 충분했다. 설마 돈만 빼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나를 챙겨줬다. 안 주머니에 있었지만 날씨를 느낄 수 있던 날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비춰 나무가 아름다운 그림자를 보이며 생명이 돋아나는 봄을 만들어냈다. 

 결혼식은 영등포에서 있었는데 식장 근처 공원에는 이미 꽃이 만발했었다. 봄내음이 난다. 시각장애인이 되어본 적은 없지만 그들의 느낌이 어떻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오래간만에 바깥구경을 했지만 잠깐 얼굴만 비추고 다시 어두운 가방 안으로 들어가게 됐다. 바깥을 더 구경하고 싶지만 아무리 소리쳐봐야 그의 귀에는 닿지 않는다. 결국 다시 나왔을 때는 천장 있는 건물 안에서 빛을 볼 수 있었고 그 정도에 만족해야만 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그의 방 거울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청소할 때 빼고는 그의 온기를 느끼지 못하지만 여전히 나에게 현금이 들어있다. 그 말인즉슨, 나를 언제든 다시 사용하겠다는 그의 생각을 느낄 수 있었다.

 6월 말쯤에 그가 프로필 사진을 찍으러 간다고 한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거라나 뭐라나. 그래서 옷을 산다고 하는데 아마 그때 내가 또 팔을 걷고 나서야 할 것 같다. 나도 아이쇼핑 하는 걸 좋아한다. 

지갑이 왜 아이쇼핑 하는 걸 좋아하냐는 물음에 정확히 뭐라고 답할 수 없겠지만 무엇이든 함께 오래 있는 사람과 닮아간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 늘 내가 있는 거울 앞에서 그가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걸 목격한다. 

그의 옷을 고르는 취향이 어떤지는 내가 잘 알고 있다. 옷 살 때 같이 골라주고 싶다. 


 오랫동안 혼자 있었다. 항상 내 옆에 차키와 립밤은 그가 출근하는 날이나 교회 가는 날 동행한다. 나갔다 와서 재잘재잘 그날 있었던 일들을 떠들어대는데 솔직히 부러웠다. 그런데 부럽다고 말을 못 했다. 

"난 집에 있는 게 더 좋던데"라고 말을 하며 콧대 높은 자존심을 지켜냈다. 태생이 그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이 못난 자존심을 버리려면 내 정체성을 알리는 듯한 이 브랜드 로고가 없어져야만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내가 평생 안고 가야 할 문제다. 그의 곁에서 필요할 때만 도움을 주더라도 폼생폼사 할 운명이다. 그러다 늘 그의 곁에 함께 있는 카드 지갑의 정체를 알게 됐다. 그놈도 꽤나 몸값이 비싼 놈인데 카드지갑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던 나는 이 못난 운명을 탓하며 충격에 휩싸이고  만다.

 조금 다른 느낌일 테지만 태어난 세월이 그리 길지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비유를 들어보자면 여행지에서 3일간 짧게 만난 그녀가 오래도록 생각난다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한 방에 살지만 가깝고도 먼 그에게서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코 앞에서 보고 있지만 마음껏 닿을 수 없는 그와의 거리가 바다 건너 얼굴도 알지 못하는 애틋한 누군가와의 거리와 동일하다. 그래서 그와 함께하는 날들이 그렇게 즐겁고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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