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시온 Jun 11. 2024

자동차

#14/28 짧은 글 에세이_사물의 입장에서 글쓰기

 는 내가 고장 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도로가 허락하는 어디든 갈 수 있다. 처음엔 신 차로 불렸다가 지금은 중고차로 불리고 지금은 몇 번째 주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주인은 전 주인의 친형이다. 




 이번 주인은 나를 적당히 아껴주며 타는 듯하지만 2년 사이에 도로에서 튄 돌들과 주차를 하고 양 옆에 몰상식한 차주 놈들로 인해 문짝에 찍혀 있는 흔적들은 나 몰라라 하고 있다.

하긴, 내가 중고차여도 난 생각보다 비싼 놈이니까.(차 수리비용은 대부분 아깝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는 병원은 가는 병원마다 나를 고치는 비용을 다르게 부르고 주인의 마음에 골병들게 하는 웃픈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에 사고가 나지 않는 이상 쉽사리 카센터라는 병원에 나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들이 말하는 기준으로 나는 오래된 차다. 12년 동안 18만을 넘어 곧 19만km가 다 되어간다. 20만km가 되면 20만 특집 다큐멘터리로 그동안 갔었던 모든 곳을 빨리 감기로 만들어서 보고 싶다. 

유튜브, 인스타 20만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주인 놈의 한숨 섞인 푸념이 들리는데 나도 내가 주인공인 계정이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아직 멀쩡하게 속도도 내고 고속도로도 다니며 주인이 어디로든 가고자 한다면 나는 문제없이 그를 원하는 목적지까지 데려다준다. 어제는 결혼식장, 오늘은 교회, 내일은 회사를 갈 것이고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즐거운 노래를 듣거나 팟캐스트 방송을 틀어 그의 귀를 즐겁게도 해준다. 나는 그의 신발장이기도 하고 옷장이기도 하며 식량창고이기도 하다. 내가 그에게 못 해주는 건 거의 없다. 나의 역할이 자랑스럽고 그만큼 가치 있다. 이제 생각해 보니까 괜히 억울하다. 오래됐다고 푸념이나 듣다니. 확 고장 나 버릴까 하는 이상한 생각도 하게 된다. 


 조만간 내 바퀴도 바꿔줬으면 좋겠다. 앞바퀴가 많이 마모됐다. 이왕이면 바퀴라도 새 타이어로 바꿔주길 바란다. 회사에 갔다가 집에 가는 길에 타이어 가게가 보인다. 타이어 가게에는 '앗! 타이어 신발보다 싸다'라는 광고 카피가 걸려있다. 트렁크에 신발만 몇 켤레인지(슬리퍼 포함 5켤레) 하도 갖다 놓으니 전부 새 신발이라는 가정하에 족히 50만 원은 나올 듯싶다. 타이어가 앞 뒤로 4개니까 다 해서 50만 원 이하면 고민은 좀 해보다가 앞에 2개만 바꿔줄 만하지 않나(차주는 타이어 가격을 잘 모른다). 분명 바꿀 때쯤 되면 타이어 가격에 대한 불만이 있겠지만 푸념이라도 들을지언정 더 오래 주인 곁에 건강한 상태로 있고 싶다. 멀쩡하고 여전히 가치 있는 존재로 남고 싶다. 


 가끔 그가 다니는 회사에서 좋은 차를 운전해보기도 하는 그가 다시 나에게로 왔을 때 한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역시 내 차가 최고야"

그의 말이 객관적인 사실이 아닌 건 나도 잘 안다. 그래도 익숙하고 마음이 편해지는 내 차가 최고라는 뜻으로 한 말이 나름 감동이었다. 나는 그와 강원도도 가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 전국을 누비며 다녔다.

여름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 잠시 주차해두면 내 체온이 잔뜩 올라가서 탈 때 불편해하던 그와 그의 동행자들이 차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내 안의 체온을 식혀주기도 하고 겨울에는 차가워진 핸들을 

맨손으로 잡지 못해 핸들 커버도 씌워주며 겨울을 보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그와 여러 추억들이 많다. 벌써 계절의 변화만 8번째 겪고 있다. 사실 말을 안 했을 뿐이지 성치 못한 몸 상태에도 열심히 그를 위해

도로를 달리고 있다. 물론 도로를 달리는데 문제는 없다만 선루프가 열리면 닫히지 않을까 봐 걱정되기도 하고 옆면의 페인트가 살짝 뜬 부분이 있어서 긁으면 10살 아이의 주먹 면적만큼 떨어져 나갈까 봐

민망하기도 하다. 하물며 인간들도 양말에 구멍이 나면 민망해하는데 자동차인 나도 그런 게 있으면 민망하다. 양말처럼 싸다면 그깟 페인트 좀 뜬 거 가지고 걱정 할리가 없지만 오래 살았고 많이 뛰었다.

이 정도면 내 나이가 중년층 중에서도 장년으로 향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다른 젊은 자동차들을 보면 "나도 한 때 저렇게 매끈하고 이쁘다는 칭찬을 받곤 했던 과거가 있었는데"라며 길지 않았던 영광을 되새기곤 한다. 그가 출퇴근하는 회사 지하 주차장만 해도 나보다 오래된 차는 많이 보이지 않는다. 차들 사이에서 꼰대가 되고 싶지 않지만 '노차 공경'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문을 덜컥 열어서 괜히 내 몸에 찍힌 자국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 가서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혼자 우는 수밖에 없지. 


 앞으로도 나와 얼마나 더 동행할지는 모르겠으나 되도록 오래 동행했으면 좋겠다. 그의 마음도 나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더울 때나 추울 때나 다리가 되어 어디든 갈 수 있게 해 주고 움직이는 프라이빗한 노래방으로써도 충분히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호의를 베풀 때 내가 도움주기도 하니까 내 역할이 그만큼 값질 것이다. 추억이 있는 공간이자 앞으로의 추억을 쌓아갈 공간을 제공해주기도 하는 나는 그의 친구이자 동행자다. 

남은 2024년, 아직 휴가철이 오지 않았다. 올해 여름은 내가 그를, 그가 나를 어디로 데려다 줄지 정하지 않았다. 또 겨울은 어디로 갈지도 기대가 된다. 자주 가진 않더라도 1년에 한두 번씩은 꼭 갔으니 좋은 곳에서 좋은 것을 함께 보며 더 없을 유대감을 키워가고 싶다. 


 



이전 14화 옷장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