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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온 Jun 04. 2024

향수

#12/28 짧은 글 에세이_사물의 입장에서 글쓰기

 나는 고체이기도 하고 액체이기도 하지만 기체이기도 하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함께하면 그냥 지나친 사람도 뒤돌아서 나와 함께하는 사람을 다시 보곤 한다. 고로 나는 신기하고 신비하며 누군가를 독보적인 존재로 각인시켜 줄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나는 냄새라는 특별한 무기로 사람들을 홀린다. 내 향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을 매혹의 세계로 인도한다. 나는 향기로 사람들의 기억과 감정을 조율하며, 그들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한 번은 그가 집 밖에 나갔다가 1분도 안 돼서 부리나케 다시 돌아왔는데 그 이유가 나와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나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언젠가 그의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그가 중학생 때 이야기였는데 당시 수학을 너무 못해서 수학 과외를 받은 적이 있었다. 과외선생님은 대학교 수학교육과에 재학 중인 여학생이었고 얼굴도 체형도 지극히 평범했다.

 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저 어려운 수학문제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고 방금 들은 내용도 문제를 푸는 순간에 백지상태로 깨끗하게 잊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선생님은 친절함과 귀찮음을 동시에 표현하듯 문제 해설을 해주시고는 다시 풀어보라고 지시했다. 이어서 가방에서 핸드크림을 꺼내 발랐는데 그가 그때 맡았던 핸드크림 향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할 만큼 강렬했는지 향에 집착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핸드크림 향으로 인해 사람이 예뻐 보이는 신기한 현상을 경험한 그는 그날 이후로 나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집 밖에 나갔다가 나를 뿌리지 않은 사실에 놀라서 다시 들어와 뿌렸던 게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나는 여러 종류, 여러 브랜드에서 여러 향으로 불티나게 팔린다. 개인뿐만 아니라 불특정 다수가. 아니 전 세계 사람들이 나를 찾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번은 그런 영상을 보는 그를 본 적이 있다. 어떤 내용이었냐면 '여자들에게 인기 많아지는 법' 같은 류의 제목의 영상이었다. 

 자기 관리를 하라는 내용이었는데 운동하고 적당히 꾸밀 줄 알며 냄새나지 않게 잘 씻고 다니라는 내용이었는데 거기에 더해 향수를 쓰든 섬유유연제나 하다못해 섬유 탈취제라도 뿌리라는 유튜버의 말이었다. 


 이 집에서도 향수나 섬유탈취제, 섬유 향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내가 존재한다. 계절에 따라, 기분에 따라 바꿔서 뿌리곤 하는 그에게도 유독 자주 손이 가는 향이 있는데 캘빈클라인 향수와 스너글 코튼 섬유탈취제다.

캘빈클라인 향수는 그의 동생 향수였는데 그가 더 많이 사용한다. 처음 그가 캘빈클라인 향수를 뿌렸을 때 한동안 우울하던 시기를 보냈는데 뿌리자마자 좋은 향에 반해 눈이 커지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 이후로 그는 이 향수만 뿌리고 다녔었다. 무겁지 않은 향이면서 부드럽고 싱그러운 느낌이다. 처음 뿌렸을 때의 느낌과 잔향의 느낌이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잔향을 더 좋아하는 듯했다. 

잔향이라 그런지 잘 정제되어 있는 향 같이 느껴졌다나 뭐라나. 스너글 섬유탈취제는 하늘색 배경에 베이지색 곰돌이가 구름을 연상케 하는 목화솜뭉치들과 같이 그려져 있는데 정말 딱 그림과 알맞은 향이다. 

부드럽고 포근한 섬유유연제 향도 났고 그만큼 향도 오래갔다. 경쾌하고 가벼운 느낌은 아니다. 겨울의 따뜻한 이불 같은 향이어서 겨울과 좀 더 잘 어울리지만 그렇다고 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의 말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365일 뿌려도 무난한 그런 향이라고 한다. 

 이런 그에게 사고 싶은 향수가 생겼는데 프라다 루나 로사와 톰 포드 오드우드다. 브랜드 명만 들어도 결코 싸지 않은 향수인데 향이라는 게 사람을 홀리는 매력이 있지 않은가. 그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사고 싶지만 이미 그것들을 대체할만한 여러 제품들이 많다. 향이 각각 다른 7개의 향수 및 섬유 탈취제가 있다. 언제쯤이면 다 쓸 수 있을지 예측이 안될 만큼 한 번 뿌릴 때 많이 뿌리지도 않는다. 향수를 좋아하지만 향수로 범벅이 된 사람들을 지나가다가 만나게 되면 자연스레 미간을 찡그리곤 향의 근원지를 

뚫어버릴 듯 째려보게 되기 때문이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다. 향수는 한두 번씩만 뿌려 적당히 사용자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는 도구로만 쓰여야 한다. 그날의 옷과 분위기에 맞는 향을 찾아 적당히만 뿌린다면 아무도 당신을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그의 친구들 중에도 향수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몇몇 있다. 그의 친구가 나에 대해 글을 써준다면 엄청난 전문성의 띈 글들이 나올 텐데 전문가가 아닌 이 사람이 글을 쓰고 있으니 그냥 적당히 아는 많은 사람들이

대충 읽고 넘어가도 할 말 없다. 



<작가의 말>

- 잠시 향수에 대해 쓰다가 반박을 하자면 향수 전문가가 아닌 이상 굳이 그렇게까지 디테일하게 알 필요도 없고 향수가 많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좋은 향이 난다면, 수컷 특유의 관리 안된 냄새만 

나지 않기 위해 깔끔하게 씻고 향수를 가볍게 뿌리는 정도로 관심만 있다. 향수 공방에 간 적이 있다. 그때 만들었던 향수는 향이 엄청나게 세고 오래갔다. 그래서 그런지 머리가 아픈 적이 종종 있었는데

향수를 만들어볼 정도의 흥미는 갖고 있지만 향수를 공부하며 전문가처럼 보이고 싶은 욕심은 없으니 이해해 주길 바란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내 방에 살고 있는 향수들도.



 우리 주인님께서 그러시다면야 나는 그러려니 해야지 뭐. 그래도 나(우리)를 잘 이용해 줘서 고맙다. 빨리 다 사용해서 또 다른, 새로운 우리를 맞이하길 바란다. 전에 다 쓰지도 못하고 너무 오래돼서 버린 향수가

있는데 그런 결말은 보고 싶지 않다. 방송이나 블로그에서 연예인이 쓴다고 광고해봐야 사용자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그것만큼 존재의 가치를 부정당한다고 느끼는 것도 없다. 

 끝으로 당신들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다. 나를 주제로 하는 소설도 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날 찾는다는 뜻이다. 당신만의 아이덴티티가 필요한가? 그럼 나를 이용해라 내가 당신을 도와줄 것이다. 그러니 이왕 쓸 거면 끝까지 다 써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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