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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온 May 29. 2024

반지

#11/28 짧은 글 에세이_사물의 입장에서 글쓰기

 내 생일은 두 개다. '23년 2월 17일, 그리고 그 이후 언저리쯤. 정확한 날짜는 모르기에 내 몸에 새겨진 날짜 '23년 2월 17일만 알고 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진짜 태어난 날은 모른다. 




 나를 항상 끼고 다니는 사람이 대학교를 졸업했다고 그의 부모님께서 동네 금은방에 가서 사주셨고 그때 내 몸 안쪽에 '23년 2월 17일 날짜를 새겨놓았다. 

그가 반지를 처음 사 본 탓에 호 수를 재는 고리에 손가락을 대충 넣어 보더니 적당히 꽉 들어맞는 반지를 골랐고 그대로 내가 만들어졌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깔끔하고 심플하게, 요구 사항까지 다 맞춰져서 만들어졌지만 손가락에 내가 못 들어갔다. 난 태어나자마자 의아한 상황을 맞이했다. 내가 원래 목걸이로 태어난 것일까? 나를 택한 사람이 맞나? 

주인이 바뀐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반전 없이 나는 손가락에 잘 들어가지도 않는 주인을 따라 그의 집으로 갔다. 검지에 들어가야 하는데 약지에 딱 맞으니 졸지에 나는 여러 사람의 오해를 사게 만드는 요망한 것이 되었다. 


 그는 처음에 왼손 검지에 끼우다가 오른손 검지에도 넣었다. 엄지나 중지에는 당연히 들어가지 않았고 새끼손가락에 넣기에는 너무 컸다. 검지는 양쪽 다 꽉 끼어서 마치 뚱뚱한 사람이 입은 찢어진 청바지 사이로 튀어나온 살처럼 보였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보기 싫었는지 며칠을 나를 반지케이스에 넣고 빛도 안 들어오는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놨다. 

한동안 깊은 어둠 속에 있었다. 며칠이 지나는지도 모른 채 그저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햇빛을 봤던 때에는 모두가 두꺼운 패딩과 코트를 입고 있었다. 마침내 '드르륵' 서랍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드디어 나가는 건가 했지만 나 아닌 다른 물건에 온기를 내주며 나는 덜그럭 움직이기만 했을 뿐이다. 괜한 기대를 하면 실망만 커질 뿐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으면 나갈... 그때였다. 내가 세상에 빛을 본 때가.


 나보다 먼저 빛을 본 건 핸드크림이었다. 핸드크림이라도 잘 바르면 내가 그의 손에 얼추 맞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핸드크림을 바르고 나를 왼손 검지에 끼운 것이었다. 딱 맞는다. 미끌거리는 느낌이 싫지만은 않았다.

부드럽게 들어가는 내가 다시 사람의 체온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추운 겨울을 녹이는 봄을 맞이했다. 달력에는 경칩이 표시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밖은 패딩과 코트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새싹이 돋아야 하지만 아직 돋지 않은 게 새싹보다 내가 먼저 따뜻한 햇빛을 다 받아내서 그런 게 아닌지. 그만큼 내가 본 햇빛은 체온만큼 따뜻하고 어둠 속에서 갑자기 켜진 손전등처럼 밝았다. 나도 그에 맞게 밝게 빛났다. 

그래 갑갑한 케이스 안 보다는 사람 손에 있을 때가 제일 멋있다. 그래 난 원래 멋있는 존재다. 특히 사람과 함께 할 때가 제일 빛난다.     


 20년 전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500원짜리 반지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는 깔끔한 디자인인데 나의 이 심플함이 마음에 드는 사람이 꽤 있나 보다. 나를 착용하는 이 사람도 다른 사람 손가락에 반지가 있으면

어떻게 생겼나 유심히 보기도 하고 이뻐 보이면 용기 내어 물어보기까지 한다. 요새는 일할 때나 친구를 만나러 갈 때, 어딜 가든 항상 나를 끼고 나가는 그는 처음에 어디에 긁히면 안타까워하곤 했는데 요새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다. 익숙함에 처음 애틋한 감정이 무뎌진 거다. 그도 그럴 것이 맨날 몸에 붙어 있으니까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가끔 세수할 때도 나를 끼고 있었다. 내 몸에 점점 상처가 많아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피부같이 생각하는지 한 번 꼈다하면 좀처럼 벗기지 않는다. 

한 번은 그가 눈이 간지러웠는지 습관처럼 눈을 비비다 나를 낀 오른손으로 비비곤 엄청나게 아파했다. 미안하지 않은데 괜히 미안하다고 해야 할 것 같은 불쾌한 죄책감이 든다. 괜히 나를 째려보는 그의 눈빛에 '뭐 어쩔 건데?' 하며 응수한다. 그가 알아볼 리 없지만 그가 괜히 화풀이하겠다고 왼손 검지나 약지에 껴보기 한다. 잠깐 끼고 오른쪽 약지에도 껴본다. 그러다 돌고 돌아서 오른손 검지에 안착하게 되어 지금은 그의 손가락에 하얀 자국을 남길 만큼 매일매일 붙어 있다. 


 일하는 날은 스마트워치를 항상 착용하고 주말에는 스마트워치 대신 드레스워치를 착용한다. 그러다 급하게 나가면 시계는 안 차고 나가도 반지는 끼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나도, 그도 서로 어이없어한다.

내가 실용성 강한 시계보다 더 피부처럼 붙어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처음엔 손가락에 맞지 않는다고 서랍 안에 넣어 놨지만 이제는 누구보다 많이 찾는 듯하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하는데 반지 일도 모르는 거더라.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진짜 앞 일은 모르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한다. 

적당히 걱정하고 남는 에너지로 그 걱정을 해결하는데 쏟아부으길 바란다. 나야 사람처럼 손이나 발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대들은 있지 않은가. 

나보다 훨씬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니 당신들의 무운을 빌며 이만 내 얘기는 여기서 멈추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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