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8 짧은 글 에세이_사물의 입장에서 글쓰기
주말이면 평소보다 나는 더 펴져 있다. 평소 구김살 없긴 하지만 그래도 나를 접어서 제 역할을 못하게 하는 이 방 주인이 혹여라도 늦게 일어날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조금의 빛은 새어 들어오게 해 놨다.
맨날 미라클모닝인가 뭔가 하는 것 때문에 빛도 없는 새벽에 일어나면서 보험은 잘 들어둔다. 평소에 일찍 일어나는 대신 주말에는 온갖 늦장을 다 부리며 일어나서 밥을 먹고 다시 누워서 주야장천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을 보곤 하는 그를 보자니 인간적인 모습에 피식 웃기도 한다.
여유로운 주말, 오후 느지막이 해 질 녘에는 태양이 주황빛으로 하늘을 물들이고 내가 있는 방으로 자신의 빛을 쏘아댄다. 주말 오후에 살짝 걷혀있는 나는 온전히 빛을 막아내지 못한다. 방 주인이 잠에서 깨고 나서 바깥이 밝은지 확인하느라 걷어본 이후로 다시 펴놓지 않기 때문이다.
새어 들어온 빛은 창문 맞은편에 있는 거울을 향해 반사되고 어둠에 가까운 내 한쪽 면에 주황색 옷을 입히곤 하는데 옷을 바꿔 입은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든다.
사람들은 한 번도 입어보지 않은 스타일의 옷을 입으면 멋있는 옷이어도 어색해하지 않은가? 나도 그렇다. 여기에 이렇게 산 지 오래됐지만 아직 적응이 잘 안 된다. 그래도 이상하진 않은 것 같다.
태양빛으로 만든 옷을 입으면 내 모습을 본 방 주인은 멋있는 걸 본듯한 눈빛으로 씩 웃곤 하는데 비웃는 느낌은 아니다. 마치 여자친구가 남자친구한테 멋있는 옷을 사 입히고 뿌듯해하는 모습이랄까?
옛날에는 무작정 싫어했다. 조선시대에 백성들이 서양을 배척하기 바라며 척화비를 세웠던 흥선대원군처럼 기존의 내 모습에서 변화되기 싫었다. 난 생긴 대로 사는 게 좋다. 변화는 귀찮은 거니까.
그런데 나의 이런 변화된 모습을 좋아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분명 기분 좋은 일이다.
사랑의 정의를 내리자면 싫어하는 걸 좋아하게 만드는 게 사랑이지 않을까.
전부터 사랑을 받긴 했지만 이번에 내가 느낀 사랑은 조금 다른 사랑이었다. 원래의 용도에 맞게 쓰이지 못한다면 누가 그 물건을 쓸까? 직장에서 높은 연봉을 주고 채용했는데 월급값을 제대로 치르지 못한다면 어느 누가 좋아할까? 나는 내가 다른 옷을 입었을 때 내 쓸모가 다 한 줄 알았다.
빛이 나를 통과할 수 없는데 마치 나를 통과한 것처럼 느껴졌으니 착각할 만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빛이 통과한 게 아니라 반사된 거라고 보면 된다. 하얀 스크린에 빔 프로젝트를 쏜 것처럼 말이다.
나는 강력해 보이기 때문에 스스로 아수라 백작이라 부르지만 사실 내 모습이 아수라 백작처럼 악해 보이거나 눈살이 찌푸려지는 모습은 아니기에 내 모습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많다.
여러모로 제 역할을 톡톡히 잘해주고 있으니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지. 사람은 백인, 황인, 흑인으로 나뉘지만 나는 이보다는 훨씬 다양한 색으로 있어서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 같기도 하다.
당장 이 방 주인만 봐도 그렇다. 밝은 색을 좋아하는데 그중 노란색을 좋아한다. 얼마나 좋아하면 게임 닉네임을 YMP로 지을까. 대충 감이 오는가? 맞다.
Y는 Yellow(노란색)을 뜻하고 M은 Mint(민트), P는 Purple(보라색)을 뜻한다. 하지만 차마 노란색으로 할 수는 없었는지 베이지색으로 타협을 했다. 나중에 그의 속마음을 들어보니 방의 통일된 인테리어를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고 한다. 베이지도 침대 프레임이랑 맞아서 다행히 예뻐 보였다. 뿐만 아니라 방 문과 색이 같았고 테이블과 책장은 어두운 나무색이었다. 침대는 짙은 초록인데 노란색보다는 무난하고
잘 어울리게 베이지가 깔끔했다. 그도 충분히 만족해했다.
가끔 난 맞은편 아파트에 나와 같은 커튼들과 인사를 한다. 나도 성격이 꽤나 밝은 편이라서 아침에 그가 환기를 한다고 나를 치고는 창문을 여는데 그때 한 번씩 인사를 건네고는 한다. 나와 비슷한 시간에 인사해 주는 누군가 있긴 하지만 자주 보이진 않는다. 아주 멀리 떨어져서 같은 하늘만 바라보고 사는 지방 친구 같은 느낌이다. 가까이에 살지만 먼 이 느낌이 외로움을 자아낸다.
사랑 없이 살아가는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음을 방 주인으로부터 느꼈을 때 난 비로소 하나의 껍질을 깨어 새로운 시야를 갖게 됐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니까. 나에게 인사를 건네어오는 커튼들에게는 감사한 마음으로 더 반갑게 인사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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