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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온 Jul 10. 2024

선풍기

#23/28 짧은 글 에세이_사물의 입장에서 글쓰기

에 매달려 하루종일이 아니라 몇 년을 가까이 지내다 보면 내가 벌을 받는 건지 원래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나만 벽에 걸려있으니 내가 이상한 물건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렇다.

하지만 내 생김새가 원래 벽에 걸려있는 게 맞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난 이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사계절이 있는 한국에서 나는 여름에만 열심히 일한다. 여름에만 일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여기까지 들린다.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 쉬운 건 없다. 여름에 밤 새 돌아가며 시원한 바람을 불어준다. 시원한 바람을 불어주어 그가 시원하게 잘 수 있음에 뿌듯함을 느끼지만 거실에 있는 에어컨 바람이 닿지 않는 이 방에서 나는 열을 내며 바람을 부는데 이제는 힘에 부친다. 덜덜 거리는 내 몸의 관절들이 내 남은 수명을 유추할 수 있게 해 줬다. 그래서 올해 여름은 어떨지 모르겠다. 이대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가기 전에 그동안 이 방에서 봐왔던 재밌는 이야기들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사실 방에 오가는 인원들이야 한정적이어서 딱히 재밌는 게 있나 싶기도 하지만 우선, 미리 말하겠다. 나만 웃긴 이야기일 수 있으니 너무 기대하지 말길 바란다. 한 번은 1년 중 대부분을 혼자 이 방에 지내고 있는 첫 째가 거울을 보며 뮤지컬 배우가 된 것처럼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이 불렀던 넘버 '레베카'를 열창했다. 노래하는 걸 워낙 좋아하니까 가요 부르듯이 불러도 보고 성악 발성으로 불러도 봤는데 굉장히 높은 음의 레베카를 혼신의 연기를 다해 부르는 꼴이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몇 번 연습하더니 아이돌 특유의 엔딩표정과 함께 거친 숨을 쉬며 연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가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사람이었으면 웃음을 참지 못해 웃는 소리가 창밖까지 들렸을 것이다.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따지면 개그 캐릭터도 아닌데 코미디 영화에서 웃기려고 발악하는 감독의 허술한 연출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몇 명 못 웃는 개그가 이 방 벽에서 재미란 걸 모르는 채 살아가는 나에게는 정말 재밌는 이야기다.

이제 알겠나? 여름에만 일하는 나는 당신이 부러워할 일이 전혀 없다. 역시나 세상에 쉬운 건 없다.


 이어서 말하자면 그는 MBTI가 ENFP다. 감정의 풍요를 모른다면 그의 감정을 따라가 보면 안다. 노래 한 곡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도 하고 아름다운 사진에 몽글몽글해지는 그의 표정이 왜 예술가가 안 됐나 할 정도다. 평소에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방에서 제한 없이 마음껏 뿜어내는 것 같다. 나에게 몇 안 되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그에게 절대 못한다고 하고 싶지 않다. 사실 못하지 않는다. 절대 프로까지는 아니지만 아예 못한다는 느낌 또한 절대 아니다. 올해 가을에 결혼하는 친구의 축가와 다음 해쯤 결혼을 예상하는 친구의 축가까지 벌써 예약이 되어 있다. 그래서 웃기기도 하면서 대견하기도 하다. 이게 다 그의 감정이 순식간에 몰입하게끔 만들어서 보고 있는 나 같은 관객도 같이 동화되는 것 같다. 이런 순간들이 자주 있다. 집에 아무도 없으면 소리를 크게 내고 누군가 있으면 조용하게 한다. 그가 제일 많이 부르는 노래는 한동근의 '기념일'이라는 노래다.(※ 요즘은 덜 부른다.) 나는 선풍기로 태어났지만 어쩌면 그의 관객으로서의 역할도 굉장히 컸다. 선풍기로 태어나서 직무유기처럼 보일 수 있으나 조용히 응원하는 한 팬으로서 사는 삶도 그가 좋은 삶이었다고 인정해주지 않을까.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건 열심히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될 수 있다.


 그의 고등학생 때의 이야기를 하자면 한 시대의 아이콘이자 미모 원탑 소리를 듣던 배우 김태희를 좋아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당시 고등학생이라 차가 없었는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같은 반 친구 3명과 동행하여 인천에서 일산 킨텍스까지 밤에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가는 내내 다음 날 있을 김태희 팬 싸인회를 기대는 하면서 잠은 어디서 잘지, 밥은 어떻게 먹을지, 씻을 건 어디서 씻을지 생각도 안 했다. 물론 걱정은 했었다. 이 무모한 모임의 주동자가 킨텍스에 몰래 잠입해서 추위도 피할 겸 잠도 자면 되지 않겠냐는 바보 같은 발언을 해버렸고 우리는 이미 달리는 버스 안이었다. 돌이킬 수 없었다. 거의 막차였고 일산에서 인천까지 갈 택시비는 없었다. 당시 학급의 부반장이었던 우리 집 첫째 아들이 등 떠밀려 킨텍스 안에서 순찰하던 경비 아저씨한테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기가 찬 표정으로 바로 나가라는 말을 하며 내쫓았다. 11년 전 이야기지만 그때의 그도 절대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3월 말 추위에 벌벌 떨던 그날의 거리를 헤맸다. 사우나에도 10시가 넘어서 못 들어가고 피시방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지하철 역까지 걸어갔고 거기서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그 기다림 끝에 잔뜩 꾀죄죄한 모습을 한 채 비장함을 보이며 그들은 킨텍스로 향했다. 대기번호 26번, 당시 그가 받아 든 대기표였다. 선착순 100명이었는데 26번 받아 들 거면 뭐 하러 가서 밤을 새웠는지 억울하기도 했지만 결국 싸인을 받아냈다. 받고 나서는 악수도 했었다. 하루동안 쌓인 피곤함은 그때 싹 다 없어졌다고 한다.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건 엄청난 동력을 준다. 비슷한 예로 바라는 목표가 있다면 달성하는 순간을 기대하며 생기는 에너지는 상상 이상으로 폭발적인 힘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를 반드시 경험하길 바란다. 나는 비록 내가 응원하는 그가 바보 같은 경험을 했고 남들이 말하는 민폐를 그 당시 킨텍스 경비 아저씨에게 끼쳤지만 어린 시절, 밤을 새워가며 김태희 싸인을 반드시 받아내겠다는 집념이 준 에너지가 만들어낸 치기 어린 객기였으니 귀엽게 봐주려고 한다. 이제는 그가 나를 좀 봐줬으면 좋겠지만 내가 너무 나이 들어버렸다. 새로운 선풍기가 들어왔다. 벽걸이는 아니고 미풍으로 틀어도 내 강풍 같은 힘이 느껴진다. 나는 신입 선풍기의 뒤에서 그를 바라본다. 이제는 내 뒤를 이어 줄 누군가가 들어왔으니 한 편으로는 마음이 놓인다. 그동안 즐거웠다, 나의 집, 나의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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