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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온 Jul 09. 2024

의자

#22/28 짧은 글 에세이_사물의 입장에서 글쓰기

기가 지나가는 구멍들이 송송 뚫려있는 등판과 나름 푹신한 좌판으로 구성되어 있는 나는 컴퓨터 책상 앞에 있는 의자다. 의자이지만 옷걸이 역할도 한다. 

첫째 아들놈이 글 쓰다가 결코 오래 자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몸은 침대에 두지만 발만은 의자에 두며 발 받침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냥 침대에 편하게 누우면 오늘의 분량을 다 채우지 못하니 온전히 침대에 몸을 맡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에게 표출하는 듯싶다. 겨우 발만 걸친다고 뭐가 달라지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자존심은 발의 위치가 결정한다. 왜 그렇게 됐을까? 




 이 집에 온 지도 꽤 됐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척추측만증에 걸린 것처럼 아주 살짝 기울었다. 첫째 아들이 그걸 느꼈는지 몸을 구부리듯 숙여 나를 위아래로 보더니 허리 아픈 이유를 찾았다며 그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내가 곧 이 집에서 나가려나 했는데 그 추측은 벌써 오래전 이야기가 돼버렸다. 불편하면 자세를 고쳐 앉으라는 요즘 시대 밈이 있는데 그걸 몸소 실현하는 그가 상당히 낙관적인 성격으로 비치는 이유다. 그는 자주 나에게 엉덩이를 붙이고 책을 읽는데 대부분 자기 계발서적을 읽고 그 외에 에세이나 소설을 간혹 읽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뭐든 좋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좋게 생각하는데 굳이 '나를 고쳐주세요'라던가 '나를 새 걸로 교체해도 좋아요'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지금도 충분히 만족하며 사용하고 있는 그에게 여전한 만족감을 주고 싶다.


 그래도 나와 함께 하는 순간들에 읽은 책이 몇 권이며 쓰인 글들이 몇 편이나 될까 생각해 보면 정확히 셀 수는 없지만 굉장히 많이 나온다. 그의 발전의 순간과 창작으로 고뇌하는 순간에 함께 한 나다. 어찌 보면 제2의 직업으로 자리매김하게 도와주는 동행자 역할도 하고 있는데 요즘 이런 생각이 드니까 평소보다 더 뿌듯하다. 이 전까지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누가 앉으면 앉는 것이고 옷걸이로 생각하여 옷을 걸어두면 그런가 보다 했는데 첫째 아들이 열심히 나와 함께하여 성과를 내는 모습들을 하나씩 보고 있자니 마치 내가 한 느낌이라던가 아들을 키워낸 부모의 심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됐다. 물론, 나는 그 느낌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대충 들은 내용들을 생각해 보면 내가 느낀 그 느낌들이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글을 쓰다가 졸리면 발을 나에게 걸치고 침대에 누워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잠을 자는 이유도 하루라도 빨리 성과를 내고 싶은 그의 의지다. 불편함과 편함 사이에 그가 갈등하다 찾은 타협점으로 보인다. 아무렴 어떤가. 그가 새롭게 마음을 먹고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가겠다고 말한 이래로 줄곧 열심히만 살아왔다. 지금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그가 곧 출근해야 하는데 열심히 글을 쓰겠다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에 나는 묵묵히 응원할 뿐이다. 그가 최대한 편하게 최선을 다해 더 기울지 않을 것이다.


 어느 누가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사느냐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 번 사는 인생 열심히도 놀아봤는데 좋아하는 걸 열심히 해본 적이 없으니 지금이라도 열심히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고 있어. 좋아하는 걸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 기회를 잡게 되고 그로 인해 돈을 벌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말이다.

 내가 생각해도 공감할 수 있었다. 당장 나조차도 그가 최대한 편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더 기울지 않겠다고 다짐하니 아직까지 버려지지 않고 내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족하지 않은 모습으로 살고 싶지만 다들 어느 한 구석은 부족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완벽을 추구하는 목표지향적인 생각은 욕심이 아니지만 목표에 매몰되어 스스로에게 또는 남에게 폐를 끼치면 욕심이다. 내 목표는 욕심인 걸까? 이미 기울어져있지만, 다시 원상복구가 불가능 하지만 크게 티가 안나는 내가 그를 편하게 해 주겠다는 마음은 욕심인 걸까. 결코 욕심이고 싶지 않다. 하물며 부서진 책장이나 장식장 같은 목재 소재의 가구들을 재활용하는 시대가 왔는데 나도 내 본래의 역할뿐만 아니라 옷걸이로도 쓰이고 발 받침대로도 쓰인다. 어디 그뿐인가... 음 그뿐이다. 딱히 이 이상으로는 그도 나를 사용하지 않고 있고 슬프지만 더 이상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가 전에 대학을 다닐 때 글쓰기 관련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글쓰기에 전혀 관심도 없었고 책은 당연히 읽지도 않았다. 그저 가끔 약속장소에서 친구를 기다릴 때 근처에 서점이 있으면 가서 대충 훑어보는 정도였다. 그러다 글쓰기에 대해 약간의 흥미가 생긴 날이 있었는데 글쓰기 강사교수님이 "시계에 대해서 글을 써봐라"라고 하면서 10분의 시간을 줬다. 그는 당시에는 '시계는 고장 나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 정도로 적었다고 했다. 나름 대학생이라는 자존심이 있었는지 눈에 보이는 초침, 분침, 시침이 있다는 둥 7살 애들도 할 수 있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직관적으로만 쓰면 대학이 아니지'라며 스스로에게 감탄을 하고 썼던 글이 부끄러워질 순간을 까맣게 모른 채 말이다. 잠시 후에 순식간에 10분이 지나갔고 다들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다가 끝이 났다. 그래도 그럭저럭 길게 써 내려간 동기들도 보였다. 다행히 교수님이 시키시진 않았지만 어떻게 써야 다양하게 쓸 수 있는지 알려주셨다. 시계에 대한 추억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시계 뒷면에서 돌아가는 톱니바퀴 등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이용하면 충분히 쉽게 써 내려갈 수 있다고 했다. 초침, 분침, 시침도 비유적 표현으로 쓰면 결코 유치하지 않을 거라고 덧붙여 이야기하는데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그는 적잖이 당황했었다. 

 '나'라는 의자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겠냐만은 나와 함께 하며 그가 썼던 글과 SNS 게시글들이 어쩌면 겉으로 보이지 않는 그의 의지와 합쳐져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처음부터 기울지 않았다. 그가 앉은 세월만큼 기울었을 뿐이다. 그가 글을 쓰기 이전에 나는 그와 함께 공부를 했고 그가 SNS글을 올리기 이전에 책상이 있어야 할 구실을 맞춰줄 파트너로서 존재했다. 삶의 이면에는 분명히 내가 살아있어야 할 본래의 이유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다. 사람이라면 태어났으니 사는 것이 아니라 이왕 태어났으니 한평생 스스로를 키우며 살아가야 할 의무를 다하기도 하고 나 같은 의자는 앉는 용도 말고도 아까 말했듯이 옷걸이나 발받침대로도 사용한다. 나처럼 바퀴 달린 의자로 레이싱을 하는 레크리에이션 게임을 하기도 한다. 누구든 쓸모없는 존재는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기울어진 나를 봐라. 난 아직 버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로 인해 탄생하는 글들을 보고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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