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고스 란티모스, 근래에 영화제와 시상식에 관심을 갖고 계셨던 분이라면 분명 들어보셨을 이름입니다. 처음 극장에서 그의 영화를 접했을 때의 일화가 떠오릅니다. 2018년의 여름에 <킬링디어, 2017>를 관람하기 위해 극장을 찾았습니다. 포스터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듯 대중들에게 이 영화의 진입장벽은 상당히 높을 것이 뻔했습니다. 역시나 객석은 대부분 텅 비어 있었습니다. 뒤늦게 한 중년의 남성이 홀로 입장하더니, 수상해보이는 텀블러(아마도 알코올)를 맨 뒷줄에 혼자 앉는 겁니다. 저의 불안감은 영화가 시작한 뒤 20분이 채 되지 않아 적중했습니다. "이딴 쓰레기 같은걸 영화라고 쳐 만들어?" "이걸 계속 보고 있는 놈들은 다 제정신이야?"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분노하다가 영화관을 뛰쳐 나갔습니다.
그 분께서 도망치듯 감상을 포기한 것은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다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의 장면들은 그를 더욱 불편하게 했을게 뻔합니다. 란티모스의 작품은 쉽게 소화하기 어렵습니다. 일상의 장면들을 담는 듯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항상 파격적인 소재가 자리 잡습니다. 전작인 <송곳니, 2012>와 <더 랍스터, 2015>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현대인들이 불편하게 여길만한 소재를 영화에 적극 활용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습니다. 대중이 기대하는 상식들, 성(姓)과 도덕 및 사회적 관습과 규칙은 란티모스의 작품 내에서 해체되고 뒤틀립니다. 영화의 구도는 철저하게 계산된 듯 인위적으로 고정되어 있어 차갑게 날이 서 있는 느낌을 줍니다. 배우의 대사에는 감정이 절제되어 있어 캐릭터를 인위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렇게 그의 영화는 뜨거운 감정이 아닌 차가운 이성의 예술을 추구하는듯 보입니다. 그런데, 이번 작품 <가여운 것들, 2023>의 결은 이전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1. 가여움, 그리고 인간에 대한 애정
벨라의 창조주, 갓윈 벡스터
<가여운 것들, 2023>은 황금사자상 수상을 비롯하여 각종 영화제에서 큰 성과를 거둔 작품입니다. 저는 이와 무관하게 영화를 꼭 극장에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제목에서 왠지 모를 연민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가여움'은 곧 누군가에 대한 연민이 담긴 표현입니다. 제가 감상한 <가여운 것들>은 란티모스가 만든 가장 인간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불완전하고 처량하며 가여운 존재입니다. 첫 장면부터 임신 중인 여성 한 명이 삶을 비관하여 다리 위에서 투신을 합니다. 저명한 외과의이자 과학자인 갓윈 박사는 빈사 상태의 그녀를 발견한 뒤에 생각합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삶을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한 여인을 되살릴 수 있겠나." 그는 여인의 선택을 존중하되 뱃 속의 아이를 살리기 위한 결정을 합니다. '연구자로서 맞게 된 운명이다, 아이의 정신을 엄마의 몸에 이식하자.' 그렇게 갓윈이 창조한여성 '벨라'는 성인 여성의 몸으로 갓난 아기의 정신을 가진 채 세상에 던져지게 됩니다.
박사의 몸 곳곳에는 어린 시절아버지가 행했던 잔인한 학대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는 연구자의 정신을 들먹이며, 아들을 사랑의 대상이 아닌 실험체로 취급하곤 했습니다. 꿰맨듯한 흔적들과 깊게 패인 흉터로 가득한 그의 얼굴은 마치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괴물의 형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외모로 인해 늘 멸시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평생을 외롭고 처량하게 살아 온 그에게 있어 벨라(=아름답다)는 특별한 실험체임과 동시에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가 됩니다.
본래 박사는 벨라를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가두고 속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자녀들이 그러하듯, 벨라는 부모의 품을 떠나고 싶었으며 자유를 갈망했습니다. 결국 박사는 세상을 모험하고 싶었던 벨라를 떠나 보내며 그녀의 앞날을 축복합니다. 그가 행했던 실험은 용서받을 수 없을 죄악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갓윈은 벨라를 진심으로 딸처럼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그녀가 떠나던 날, 옷의 솔기를 정성스럽게 꿰매어 비상금을 숨겨주던 장면은 분명 아버지의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이 순간, 갓윈은 자신을 학대했던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주체로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2. 신체의 자유, 나에 대한 자유
세상을 탐험하는 벨라
이 영화에는 성(姓)에 대한 사회적 관념에 어긋나는 장면들이 수시로 등장합니다. 어린 아이의 정신으로 처음 성적 쾌락을 마주했던 벨라에게 '부끄러움' 따위는 없습니다. 그녀는 주변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며 결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에게 대단히 피해를 준 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벨라에게 '부끄러움을 강요'하고 그녀의 신체적 자유를 제한하고 빼앗으려 합니다.
벨라를 억압하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현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인간의 행복추구권에 기반합니다. 누군가의 간섭이나 지시에 휘둘리지 않고 성(姓)과 관련된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매우 다릅니다. 우리 사회는 성적인 결정의 순간들을 편견과 차별의 시선으로 재단합니다. 벨라와 같은 여성이 우리 주변에 있다면 필시 그녀는 괴물과 같은 취급을 받게될겁니다. 우리는 '도덕' 혹은 '사회적 통념'이라는 기준 하에 누군가의 결정권을 통제하고 신체의 자유를 억압해왔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일은 신체의 자유와 쾌락을 추구하는 것과 큰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따르는 성(姓)에 대한 잣대와 평가는 사실 인간의 행복에 크게 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3. 편안함에 이르다
여행의 종착지
많은 이들의 인생 드라마, <나의 아저씨, 2018>의 명대사를 알고 계시나요? '편안함에 이르렀나?' 라는 대사는,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에 벅찬 사람들에게 큰 위로의 메시지가 되어주었습니다. 이 대사는 <가여운 것들>의 마지막 장면을 묘사하기에 적절합니다. 이 세상을 몰랐던 벨라는 집을 벗어나 먼 곳을 탐험하며 많은 것을 보았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좌절의 순간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친구였던 해리는 '추악하며 이미 망해버린 세계'라며 자조했습니다. 허나 벨라는 끝까지 세상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끝에 다다를 때 쯤, 그녀는 처음 자신이 창조되었던 고향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자신의 탄생에 대한 모든 비밀을 알게되었음에도, 창조주를 용서하는 아량을 보여줍니다. 갓윈 박사는 자신의 피조물이 온전한 인간으로서 이룩한 성장을 목격했고 그녀의 곁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벨라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요? 아마도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자신의 고향 집 마당에 앉아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사색에 잠기며 책을 읽는 그녀의 모습은 마침내 여행의 끝에 다다른 듯 보입니다. 변화와 모험을 추구했던 소녀는 고향으로 돌아온 끝에 여유 있는 미소를 지어보입니다. 인생이란 결국 수 많은시행착오의 끝에 마침내평안을 찾는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 한 가지 소식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차기 작품은 놀랍게도 영화 <지구를 지켜라, 2003>의 리메이크작이 될 예정입니다. 한국 영화사에서 비운의 명작으로 남게 된 이 전설적인 작품이, 그의 손을 거쳐 어떤 모습으로 재탄생할지 정말 궁금합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떤 방식으로 리메이크가 되더라도,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영화가 완성되리라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