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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나무 Feb 16. 2024

이걸 자랑이라 해도 될까요?

  친정 엄마는 노산이고 집안도 어려워 태중의 나를 지워야 할까 고민하셨다고 한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웃집 아주머니들은 기형아 같다며 수군거리셨고 천사 같으셨던 외할아버지는 "눈꼬리 쉰(상한) 년들~ 사람 볼 줄 모르는 년들" 하시며 역정을 내셨다고 한다. 이 욕설이 나의 성장에는 지지와 격려가 되었다. 백일 사진을 보면 내가 보아도 ET에 가깝다. 인정한다.


 

   어릴 적 친정 엄마는 어린 나를 보듬어 안고 "앞뒤꼭지 삼천리 뺑돌아서 육천 리 ~"나의 큰 머리를 앞뒤로 짚어가며 챈트를 지어 부르셨다. 내게는 놀림이 아니고 신나는 리듬의 즐거운 노래였고 이 즐거운 노래를 아버지께 알려주고 싶어 식사하시는 아버지의 머리 앞, 뒤를 짚어가며 불러드렸다. 그날 이후로 그 챈트는 우리 집에서 사라졌다. 그 후로도 기발한 아이디어로 엄마는 나를 계속 놀리셨고 나는 마음속으로 7살만 되면 다리 밑 우리 진짜 엄마를 찾아가야겠다.라고 다짐하며 독립심을 키웠다.


  

  국민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은 통신표에 맡은 부서는 거북이 청소여왕, 종합평가란에는 달님 같은 마음을 가진 아이입니다.라고 적어주셨다. 그때 이후로 내 마음속에는 달님 같은 아이가 함께 자라고 있었다. 엄격한 기독교 가정에서 계속 양보하고 배려하는 게 최선이라 믿고 자란 나의 중학교 시절, 체육을 지지리도 못하면서도 중학교 3년 내내 체육부장을 맡고 있는 나를 체육을 잘하는 몇몇 우리 반 친구들이 계속해서 몇 달을 따라다니며 비웃고 놀렸다. 하교 후 학교 다니기 싫다며 눈이 벌겋게 퉁퉁 붓도록 엉엉 우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시던 엄마는 그 애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냐고 물어보셨다. 이길 수 있다고 했더니 하고 싶은데로 하라고 하셨다. 그 애 엄마들이 병원비 물어달라 하면 병원비 물어주고 교장 선생님이 부르면 학교 찾아가서 당당하게 면담하겠다고... 그다음 날 나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를 이루었다. 어린 마음에도 맨날 참아주는 게 능사는 아니구나 깨달음에 이르렀다.


  

  직장에 취직을 하고 주말이면 교회봉사를 하며 나는 허약한 엄마의 보디가드이자 자존심으로 살았다. 어릴 적부터 우리 엄마는 병약해서 빨리 돌아가실 줄 모르니 나라도 지켜드려야겠다는 두려움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었던 터였다. 언젠가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내가 너를 안 낳았으면 무슨 낙으로 세상을 살았겠냐고 내 얼굴을 쓰다듬어 주셨다. 


  

  내 태몽은 씨름판 상품으로 주는 황소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여름날 씨름판 구경을 갔더니 출전 선수가 한 명도 없자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할아버지가 커다란 황소를 "자네가 가지소" 하며 엄마 손에 고삐를 쥐어주고 가셨단다. 나의 황소 운명은 그렇게 정해져 있었나 보다. 나는 일을 앞에 두고 몸을 사리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오지랖이 필요 이상으로 넓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내가 좀 힘들어 남이 편안할 수 있다면 기꺼이 하는 편이다. 또한 창의력까지 좋아 업무처리를 함에도 이렇게 해 놓으면 내 주변 사람들이 좀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되면 야근을 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더라도 기어이 찾아서 해낸다. 그러니 일생이 힘들다. 가벼운 이야기로 어느 바쁜 출근 시간, 어떤 여자분이 이중주차된 SUV를 밀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길래 내차로 바삐 걸어가다가 청하지도 않은 여자분에게 발걸음을 돌려 다가가서 내 가방을 내려놓고 흰 블라우스 얼룩 묻혀가며 온몸으로 낑낑 대며 밀어주고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그 젊은 새댁은 차에 손만 대고 미소 짓고 서있다. '힘 세네' 하는 표정이다. 어이없어 멍하니 쳐다보자 머쓱했는지 "고마워요" 한마디를 뒤로 날리며 여자는 후다닥 출발해 버린다. 말해 뭐 하겠는가 시집살이 역사는 소설책 두 권은 쓸 수 있겠다. 어느 날 시 아주버님이 "한 집안의 큰며느리는 하늘이 내린다는데 우리 집 큰며느리는 정말 하늘이 내리신 거 같아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사람이 좋으면 저 사람 참 좋다 하지 않고 바보 취급하니까 말 좀 하고 사세요. 그러다 병 생겨요" 이야기하실 정도였다. 나이 먹고 온갖 병치레에 포기하고 주저앉고 나니 이제와 왜 그때 그들의 무례함에 선을 긋고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96세가 되신 친정아버지가 불안한 언니는 서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내려와 아버지 안부를 살핀다. 지난번 큰 언니는 "우리 복덩이, 아빠가 우리 막내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어" 하며 곧 60이 되어가는 나를 아기 다루듯 안아준다. 우리 언니는 97세가 되신 치매증세가 있어 깜빡 걸쇠를 안 하고 잠든 날이면 혼자 나가 아파트를 헤매고 다니시거나 티브이를 보며 "저 년들이 내 집에서 장사를 하며 세를 내지 않는다"며 화를 내시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형부가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도 고려대 안암병원 의료진들이 이렇게 깨끗하게 관리되고 회복하는 환자는 대한민국에서 처음 본다 할 정도로 헌신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런 언니가 내 언니여서 자랑스럽고 너무나도 감사한데 말이다. 


  

  평소 지혜로운 성품이 좋아 함께 하고픈 선배 언니에게 나를 규정해 보는 워크지가 있어 나를 규정할 수 있는 단어는 뭐가 있을까? 묻자 "너는 내게 힘을 주는 친구야"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어떤 힘이 되어주었을까? 하며 당황스러웠다. 최근 읽게 된 임후남 작가의 '나는 이제 괜찮아지고 있습니다.'의 한 문장이 떠오른다.  "그를 통해 내가 채워지고 나를 통해 그도 채워지고 채움은 온기 같은 것입니다." 문장처럼 곁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만해지는 친구말이다. 가수 양희은 님이 인터뷰 중에 "무슨 일이 있을 때 너 왜 그랬어? 따져 묻지 않을 친구, 그 애가 그랬다면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 말없이 기다려줄 수 있는 친구 나는 그런 몇몇의 친구와 함께 쭉 갈 거야." 라며 자기는 번잡스러운 인간관계를 만들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셨다. 그때 나와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는 친구 5명에게 단어의 예시를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친구들은 나를 규정하는 단어로 정의로움, 용기, 따뜻함, 순수 등을 공통적으로 떠올렸다. 나의 그런 면을 보아주고 함께 해주는 그런 친구들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도 내게는 자랑이다. 


    

   오래전 전직 장관을 지내신 분에게 "장관님 오랜 공직 생활을 해오시면서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운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기자가 묻자 자신의 업적을 이야기하실 줄 알았는데 " 마누라가 하나인 것도 자랑이고, 집이 한 채 인 것도 자랑이고 월급 받아 살며 엄청난 부자가 아닌 것도 자랑이고, 흔한 애인 없는 것도 자랑이고, 아들 딸이 제 앞가림하며 이 사회에 건전하게 살아가는 것도 저의 자랑입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이 사회에 저런 어른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씀에는 청빈과 화목과 감사가 들어 있었다. 


   먼 훗날 나 스스로가 내 삶이 자랑스럽다 생각이 남을 수 있도록 뚜벅뚜벅 느린 걸음으로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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