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티커를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스티커가 가진 힘을 좋아한다.
스티커는 작고 얇다.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사소하고, 언제든 떼어낼 수 있을 만큼 가볍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스티커 하나가 붙는 순간, 그 자리는 더 이상 그냥 종이가 아니다. 그 페이지는 “한 번 지나간 날”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시간”이 된다. 누군가는 거기에 별을 붙이고, 누군가는 웃는 얼굴을 붙이고, 누군가는 작은 문장을 적어 넣는다. 우리는 그렇게 조용히, 가장 연약한 방식으로 인생을 붙잡는다.
기록은 본질적으로 편집이다. 어떤 순간은 남기고, 어떤 순간은 지우고, 어떤 장면은 강조하고, 어떤 감정은 이름을 붙인다. 스티커는 그 편집의 최소 단위다. 그 순간에 “이건 중요해”라고 말하는 아주 작은 기호.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마법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차원이라는 것도 결국 이 스티커와 닮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차원을 수학적으로 배운다. 1차원은 선, 2차원은 면, 3차원은 입체, 4차원은 시간. 하지만 그런 정의는 이해는 되는데 잘 느껴지지 않는다. 머릿속에서만 끝나고 손끝에 닿지 않는다. 나는 차원을 조금 다른 언어로 바꿔보고 싶었다. 지금 살아 있는 감각으로, 누군가의 마음에 바로 닿을 수 있는 방식으로. 그래서 나는 차원을 이렇게 다시 정의해 보기로 했다. 차원은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세계에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방식이다. 차원은 지식이 아니라 편집 권한이다.
우리는 무엇을 어디까지 만질 수 있을까. 우리는 어디에 표시를 남길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어디까지 수정할 수 있을까. 이건 내가 차원을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때 스티커는 놀랄 만큼 정확한 비유가 된다. 나는 3차원 세계에 살고 있다. 공간을 걷고, 계단을 오르고, 바람을 맞고, 손으로 물건을 만진다. 그런데 내가 남기는 흔적은 대부분 2차원으로 눌려 저장된다. 다이어리의 페이지, 사진 속 장면, 화면 속 기록, 노트의 밑줄. 현실은 입체인데, 기억은 평면이다. 나는 분명히 살아가고 있는데, 남기는 것은 얇은 표면뿐이다.
우리는 현실을 직접 편집하지 못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대개 현실을 번역해 기록하는 일이다. 공간은 살아 있지만, 시간은 흘러간다. 그래서 우리는 흘러가는 것을 붙잡기 위해 종이를 쓰고 화면을 켜고, 의미를 붙이기 위해 스티커를 붙인다. 어쩌면 인간은 원래 ‘현재’라는 막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존재다. 우리는 과거에 손을 넣을 수 없고, 미래를 잡을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의 흔적은 늘 현재에만 생긴다. 우리는 오직 지금 여기서만 실수하고, 지금 여기서만 울고, 지금 여기서만 회복한다. 지난 장면에 돌아가 흠집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 아직 오지 않은 장면을 미리 긁어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도 자주 다른 시간을 만지려 한다. “그때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이 욕망은 단순한 후회나 불안이라기보다, 시간에 대한 갈망에 가깝다. 우리는 사실 시간을 편집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나는 상상했다. 만약 4차원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감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