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해 보이지만 결코 만만하지 않은
식탁에 올릴 적당한 메뉴가 생각나지 않을 때면 만만한 김밥을 떠올린다. 우선 먹기 편하고 모두가 좋아한다는 이유에서다. 덤으로 하나 더 얹자면, 노란 단무지, 주홍 당근채, 초록 시금치 등의 다채로운 내용물 덕분에 대충 만들어도 맛이 그럴듯하거니와 예쁘고 푸짐해 보이는 것도 한몫한다.
나의 며느리도 김밥을 좋아한다.
이제는 좀 먹어봤다고 김밥 만들기를 가르쳐 달란다. 요리랄 것도 없는 김밥말기를 배우고 싶다 하니 시어미인 나도 식은 죽 먹기로 보란 듯이 가르칠 수 있는 품목이라 흔쾌히 시간을 내어 본다.
그러나 김밥에는 단순한 외양과 달리 복잡한 속내가 있다. 먹을 때는 하품 나올 정도로 심심하지만, 만드는 과정이 결코 지루하지 않은 것은 말 그대로 반전이다. 재료가 까다롭고 내용물이 다양할수록 맛은 좋으나 준비하는 수고는 늘어난다.
만만해 보이지만 결코 만만하지 않은 김밥,
자, 며늘아, 그럼 준비과정을 한 번 볼까!
김밥은 뭐니 뭐니 해도 꼬들한 밥이 생명이다.
흰 쌀을 씻어서 20분 정도 불린 다음 적당량의 물을 붓고 백미취사 버튼을 누르면 된다. 가장 간단해 보이지만 가장 중요하다.
알 유 뤠디더냐?
지금부터 다음의 재료들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계란은 풀어서 소금으로 간하여 도톰하게 부쳐내고,
당근은 껍질을 벗겨낸 후 가지런히 채 썰어서 볶아야 하며,
시금치는 다듬고 물에 씻은 후 끓는 물에 데쳐 참기름과 소금으로 무쳐 놓는다.
단무지는 각지게 썰은 다음 키친타월로 감싸서 물기를 짜내야 하고(요즘에는 김밥용 단무지와 우엉이 팩에 담겨 시판되고 있으니 이것을 이용하거라. 참 살기 편한 세상이다. 그러나, 키친타월로 물기 정도는 짜내야 한다),
그뿐인가!
햄은 단단한 비닐포장을 벗겨낸 후 네모지게 썰어 프라이팬에 살짝 볶고,
맛살도 키친타월로 물기를 뺀 후 길게 반을 갈라놓는다(반을 갈라야 부피를 줄일 수 있다).
여기에 어묵을 더할 것인지, 불고기 양념으로 버무린 쇠고기를 더할 것인지는 그날의 상황에 따라 결정한다. 단, 어느 것 하나라도 넣고 안 넣고에 따라 맛의 차이가 현격하다는 것을 잊지 마라.
만약, 어묵으로 하자면,
끓는 물에 한 번 튀겨서 기름을 뺀 후 길게 자르고 프라이팬에 살짝 볶아둘 것이며,
불고기로 할라치면,
갈아놓은 쇠고기를 불고기 양념으로 1시간쯤 미리 재워둔 후 프라이팬에 골고루 볶으며 잘 익힌다.
지금 한숨을 쉬었더냐?
전체 과정의 반 정도 했으니 앞으로 반만 더하면 된다. 금방이다.
취사가 완료된 밥을 주걱으로 퍼서 양푼에 펼쳐 식힌 다음, 적당량의 소금과 참기름(나는 들기름을 선호한다.)을 넣고 살살 비벼둔다.
주방 카운터 위에 알루미늄 포일을 넓게 깔고 김 발을 펼쳐놓는다.
비벼둔 밥을 김 발 가까이 놓고, 나머지 재료들을 접시에 일목요연하게 담아 밥 옆에 배치하면,
이제야 비로소 네가 원하던 김밥말기 시작이다.
지금부터는 손의 악력이 중요하다. 까딱하다간 김밥 옆구리 터지는 수가 있으니 힘 조절을 유념하라.
김 발 위에 김밥용 구운 김 한 장을 올려놓고 김의 세로 3분의 2 지점까지, 비벼둔 밥을 얇고 이븐 하게 살살 펼친다.
준비해 둔 각종 재료를 중복되지 않도록 하나씩 밥 위에 옮겨 담는다. 색상배합의 센스가 있으면 더욱 좋다.
손가락에 힘을 더하거나 빼며 김 발에 의지해서 김밥을 말도록 한다. 김밥이 도르륵 말려서 끝 지점에 왔을 때 밥풀 몇 개를 꾹꾹 눌러 끝 부분을 붙이는 것은 며느리에게만 알려주는 노하우란다.
김밥말기가 모두 끝났으니 보거라, 이제 칼질 들어간다.
말아놓은 김밥 윗면과 칼 양날에 참기름(나는 들기름을 선호한다.)을 바르고 도마 위에 올린 다음 두 줄씩 썰기 시작한다. 한 번에 한 줄씩 썰지 않음은 프로의 위용을 보이려는 나의 의도이며, 시간을 단축시키는 효과를 보기 위함이다. 칼이 잘 들어야 함은 물론이다.
썰어놓은 김밥을 접시에 보기 좋게 담으면 마침내 완성이다. 곁들이로 라면이나 어묵 국물 또는, 계란탕이 있으면 목메임 없이 김밥이 잘 넘어갈 것이다. 이렇게 만든 김밥이 맛이 없을 리 없는데, 혹여 맛이 없다면 소금 간이 문제이거나 밥이 안 좋은 것이다.
가르치고 배우면서 만드느라 준비과정만 한 시간이 걸렸다.
계란부침에 자신 있다며 스크램블드 에그로 만들려는 것을 재빨리 막았던 것이 1시간으로 맞출 수 있었던 신의 한 수였다. 그 외에는 며느리의 야무진 손 끝을 타고 김밥 여섯 줄이 옆구리도 멀쩡하게 잘 나왔다.
먹는 것은 10분이 채 안 걸렸다.
김밥의 속내를 파악한 며느리는 충격을 받은 기색이 역력하다. 쯧쯧...
결국 마음 약한 시어미는 깊이 넣어둔 비밀 하나를 내어준다.
"나는 이미 글렀으나, 너희는 앞으로 김밥일랑 사 먹거라. 마트 김밥도 맛있다. “
"아!"
며느리의 낯빛이 일순간에 활짝 펴지더니 그제야 웃음이 흘러나온다.
아....
이 아이도 결코 만만하지 않다.
대문사진: Pixabay로부터 입수된 junghoyoung4 님의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