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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aleopard Jun 01. 2024

Dogmatic Humanism

 

만물을 그것이 살아갈 수 있게 다소 놔둬야 한다는 주자학의 여유는 모노노아와레와 비슷한 듯 하지만, 주자학에는 아와레(애처로움, 애상감, 슬픔, 가라앉는 마음)가 없다. 아와레는 어디서 오는 거냐면, 모든 것이 이상적이기 위해서 내가 모노에 다가갈 수 없다는, 지켜볼 수밖에 없는 마음이 아와레가 되는 것인데, 중국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만물과 자신 사이의 분리는 자각되지 않는데 왜냐면 바람이 불고 그 속에 만물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국 사람들은 좀 놔둬야, 적절히 죄어주고 적절히 풀어줘야 그것이 살 수 있고, 그게 살 수 있어야 나한테로 올 수 있으며, 반드시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모든 것은 생생무궁하며, 만물이 상관하며 천하의 기는 유유히 흐르기 때문이다. 천인합일이란 이런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가장 원리주의적인, 교조적인 주자학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유교 탈레반이라는 말이 아마 유교권에서 유일하게 통용되는 나라일 지 모른다. 그런데 동시에, 한국인들은 한중일 삼국 가운데 중국인도 일본인도 인정하는, 음주가무(武도 포함하여)에 가장 능한 민족이 되어 있다. 한국의 민족예술은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듯이, 즉흥성이 우수하고, 정적인 체계보다 동적인 변화생성을 중시하며, 맺고 푸는 흐름의 굴곡 속에서 어떤 다이나미즘을 표현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 유독 세계적으로 음주가무에서 두드러지는 카리스마를 발휘했던 동아시아인 중에는 조선인이 많았다. 러시아에서 어떤 일본인이, 어떤 중국인이 빅토르 최 같은 반열에 들 수 있었나? 빅토르 최 같은 음유시인들이 또 한국에는 당시에 얼마나 득시글거리고 있었는가?(그의 음악은 신중현과 김광석을 연상시킨다) 

한국의 미학에는 중국적 황폐함, 살풍경은 없다. 황폐함, 살풍경으로 치자면 한국은 중국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중국에는 없는 풍류가 한국에는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제아무리 주희라고 하더라도 도가나 법가, 불교, 묵가 같은 것들의 후예를 끊임없이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문득 불어오는 바람에서 천지만물의 생생조화를 느끼는 순간에도, 저 무시무시한 사조들의 비정함, 무정함, 모든 것을 황폐하게, 살풍경으로 만드는 감각에 어느 정도는 물들게 된다. 반면 조선에서는 교조주의에 의해 저 사조들이 전부 철저히 짓밟혔기 때문에, 주자학자들은 중국에서처럼 양유음법을 한 게 아니라, 양유음풍, 겉으로는 유자였고 뒤에서는 풍류가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교조주의는 무엇인가? 

등소평의 이미지가 도움이 된다. 등소평은 문혁에서 정점을 찍은 마오주의를 불법화함으로써 휴머니즘의 도입이라는 중국공산당사에 전례 없는 전회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는 그 휴머니즘을 강력한 당의 영도 아래, 인민들에게 받아들이라고 명령했다. 이것은 교조주의적 휴머니즘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물론 중국은 중국이기 때문에, 극좌파는 여전히 중국의 곳곳에서 그저 자신들이 하던 일을 계속 하고 있었다. 단지 그 활동 영역이나 영향력이 매우 제한된 것 뿐이다. 그럼에도 중국 대륙의 디폴트와도 같은 황폐함, 살풍경함은, 교조적 휴머니즘의 교조주의적 성격을 약화시켰으며, 비록 무수한 타협의 산물이기는 했지만(왕후이도 출발은 휴머니스트의 외피를 쓴  루쉰 연구자였다) 왕후이 같은 반인간주의자의 대두를 일정 정도 허용하기까지 했다. 

조선 주자학의 교조주의는 등소평주의가 더욱 래디컬해진 것이라고 간주하면 대강 들어맞을 듯하다. 주자학이 본래 굉장히 급진적인 측면이 있다고 말하는 연구들이 있는데, 무엇에 비해 급진적이라는 것인가? 결국 송대 이전 유학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데, 송대 이전 유학과 주자학의 결정적인 차이는 유학이 불교와 도가를 적극 수용했다는 점에 있고, 불교와 도가야말로 중국의 모든 급진성이 유래하는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사상으로서 주자학은 진나라의 멸망 이후 체제교학이 된 유학에 남겨진 해결할 수 없던 문제, 제국의 통치는 사실상 법가에 의해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유교라는 의미체계가 공식적인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어떤 아포리아를 가장 완성된 형태로 해결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주자학에 의해 유학의 전통, 관습에 대한 옹호가 비로소 도가와 불교에 대적할 수 있는, 오히려 때로는 그것을 넘어서는, 천하를 평탄화하는 강력한 형이상학 체계(이것을 제국의 이념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와 결합할 수 있었다. 

주자학의 다른 급진성은 소위 맹자의 재평가와 관련 있고 그것은 결국 황권의 약화와 신권 강화 내지 지방 사대부들의 독립화 같은 역사, 사회적 현상들과 함께 설명되곤 한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오히려 조선이 다시 한 번, 주자학의 정통을 중국에서 빼앗아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송대에, 그것도 북송에서 남송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탄생한 주자학이 교조적 지위에 오르는 것은 원대, 특히 명대 이후다. 명대가 되면 주자학은 그야말로 흔들리지 않는 체제교학이 되지만, 동시에 황권 약화에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의 현실에서 사대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적었다. 전체 인구 대비 사대부의 비율도 너무 적었고, 주자학의 교화가 미친 인구 비율도 너무 적었다고밖에는 할 수 없다. 만약 민심의 구석구석까지 주자학의 교화가 미쳤다면, 그 민중 가운데 한 명인 주원장의 집안에서 사대부들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중국에서 주자학의 교조화는 법가적(따라서 도가적이며 때로는 불교적인) 황제의 법술세, 그리고 그것이 문자 그대로 ‘대표’하는, 주자학이 도저히 교화할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한 대륙 ‘인민의 총의’와 분리할 수 없는, 사실상 커다란 제약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해야 한다. 

반면 조선에서는 법가나 도가가 일찌감치 말살된 것은 물론이고, 고려 500년 동안 대단한 권세를 누린 불교조차 순식간에 진압 당해야 했으며, 유학 내에서조차 양명학과 사공학파에 대한 전격적인 타격이 반복되는 철저한 순화가, 특별히 왕실이 주도했다기보다도, 기층의 그 출신이 매우 의심되는 무수한 자칭 “사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오늘날에도 자칭 사림들, 선비 집안 사람들이 사실상 서울의 천민들보다 조선 민족의 민속, 민중의 진정한 언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을 훨씬 잘 보존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불교 축제에 몰래 난입해서 동료들과 함께 불상의 얼굴을 칼로 훼손했다는 젊은이 “사림”들의 기록을 보면, 노원에서 어슬렁거리던 무수한 젊은 양아치 무리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열렬한 학생운동가였으며 경찰의 추적을 피하다 마주친 죄 없는 다방 주인인지 하는 여자를 강간하고 살해한 20세기 말 전라도 어느 대학의 학생회장 같은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중국공산당의 ‘민중 속으로’ 운동은 법가적으로 급격하게 민중의 근대화를 이뤄나갔다. 근대라는 먹줄을 갖다 놓고 어긋나면 죽이니 민중은 민속이고 뭐고 다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조선 운동권의 ‘민중 속으로’ 운동은 그런 식이 아니었다. 조선 운동권은 대부분 그 자신이 민중과 구분되지 않는 존재들로서, 사실상 박정희가 시작한 일본식 “근대화”에 저항하는 사실상 지독하게 보수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엄격한 NL, 맑스주의자들도 중공의 법가 정신에는 결코 미치지 못했다. 문혁 때 조선족이 곤욕을 많이 치렀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 그것은 한족의 내셔널리즘에 근거한 민족차별(이건 우리가 우리의 내셔널리즘, 그리고 우리의 타민족 차별을 한족에 투영하는 것 아닌가?)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조선민족에게 법가정신이 결여되어서 생긴 문제였던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요컨대 조선족은 한족보다 덜 황폐하고 덜 살풍경했던 것 뿐이다. 더 “민중적”이고, “라블레적”이고, 바흐친이 말하는 “중세르네상스의 민중문화”와 통하는 카니발 문화를 더 많이 보존하고 있었을 뿐인 거 아닌가? 

조선의 주자학은 교조적으로 휴머니즘(유학의 본래 위마니즘, 전통과 관습에 대한 존중과 민중문화 즉 풍류도의 결합)을 관철했다. 여기서 여러 문제들이 합류한다. 왜 조선의 민중문화(음주가무부터 kpop까지)는 일본이나 중국보다 뛰어난가? 중국에서는 민중문화 자체가 오래 전부터 법가, 도가, 불교 등에 의해 거세당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민중들 스스로가 주자학-지배이데올로기를 익혔기 때문에 민중문화가 보존될 뿐만 아니라 주자학과 함께 전개되었다. 조선인은 누구나, 법가와 분리된 유학, 이번에는 민중문화와 연결된 그 유학-민중문화의 혼합체를 교조적으로 신봉하도록 교육 받았다. 이 스펙트럼에서 유학 쪽으로 기울어지면 사림이 되었고, 민중문화 쪽으로 기울어지면 양민이 되는 식이었다. 조선에서 상업이 발전하지 못한 것은 이런 점에서 보면 당연한데, 사림도 상인을 탄압하고, 민중도 상인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사림-민중의 거대한 혼합체는 사실상, 중인이든 상인이든, 인간대접 받고 싶으면 먼저 우리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손짓하는 것이다. 물론 일부가 된다고 핍박이 멈추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살려는 드릴게, 인 것이다. 여기서 작동하는 것은 강력한 결과적 평등주의이지, 무슨 기회의 평등 같은 것도 아니고, 조건의 평등도 아니다. 조선 주자학이 “보수적”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것은 지배계급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정반대로, 민중과 구분되지 않는 사림들이 주자학 운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침체의 유통”, 즉 높은 회전율로 사회적 부와 권력을 재분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계층의 상하이동에 대해 민중은, 재밌다고는 생각하지만 진지하게 내 일이 되면, 그것을 막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강력한 결과적 평등주의는 필연적으로 그러한 계층 이동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일어나는 일은, 아주 천천히, 장기간에 걸쳐 (마치 역사의 무의식인 것처럼) 일어나는 (하향) 평준화다. 이것을 보수적 공산혁명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보수적 공산혁명(차라리 공산유신共産維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이야말로 주자학의 이상이고 유학의 이상이다. 

일본에 대해 생각할 때는 역시 일반적인 ‘민중’ 범주의 결여가 두드러진다. 하나의 민중 같은 것은 없으며 갖가지 상자들이 있다. 중국에서도 조선에서도 제국의 이념은 비록 그 교조주의의 정도는 다르더라도 각각의 민중을 낳았는데, 일본은 제국의 이념이 없었던 것에서 상자들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도쿠가와 시대에 이미 직분윤리에 충실한 가직국가가 완성된다. 그것은 농업이 아닌 상업이 잘 나간다는 점, 그리고 법을 경시했다는 점만 제외하면 법가의 이상향을 결과적으론 그대로 실현한 것이기도 하다. 무지한 채 자신의 직역에만 몰두하며 이동의 자유나 직업 변경의 자유나 신분 상승의 자유 같은 일체의 것에 대해 무관심한 백성들이 에도 일본에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한 것은 법의 화신이자 인격화된 空, 인격화된 도가적 의미의 무위인 한 명의 천자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상자들이 부서지고 뒤섞였을 것이다. 오구라 기조가 공자를 모노노아와레와 연결한 것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도쿠가와 레짐의 지배원리는 모노노아와레이자 원시유학의 봉건주의와 유사한 것이며, 그런 한에서 법가를 사상으로서는(특히 법가의 부국강병주의를) 철저히 부정한다. 동시에 에도 시대 주자학은 전혀 교조적이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주자학이 교학이었음에도 영향력이 제한적이었다면, 일본에서는 주자학이 체제교학이 아니었음에도 영향력이 증대했다. (조선에서는 체제교학이었으며 영향력이 막강했다) 일본에서는 확실히 하층 사무라이와 민중의 주자학에 의한 교화가 일어났다. 메이지유신은 그 방향성만 보자면, 청말에 한족 사대부들의 군벌화, 명말에 사대부들의 반청기의, 고려의 무신정권 전복 내지 조선 개국 등과 닮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450년 늦은 조선개국이 메이지 개국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라시대 율령 반포도 대략 한반도보다 350년 정도 차이가 난다) 그러나 주자학이 몽골 민족이나 만주족에게 이용될지언정 그들에게 “교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지 못했던 것처럼, 일본에서도 끝내 “교조주의”는 도입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절대다수의 일본인 주자학자들은 대륙 주자학의 교조적 성격을 자신들이 받아들였음을, 삶에서 증명해내지 못했다. 이 ‘섬나라 근성’이 소위 “전향문제”에까지 이어진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이건 물론 교조적 성격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강압하는 시스템(로마 교황청이든 중국과 조선의 관료제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구라 기조는 황도사상을 사례로 강조하는데, 내가 보기에 황도사상은 경전도 없고 형식도 없고 내용도 없기 때문에 주자학과 비교될 수 없다. 종전까지도 황도사상은 “아시아 인민”의 황제로서의 천황상을 인정하지 않았고 인정할 능력도 없었다. 조선 상자, 남양 상자, 지나 상자 등등 여러 상자를 하나로 만드는 빈 중심으로서의 천황상, 상자들을 (일체의 법적, 이념적 억압 없이, 이 점이 법가-주자학과 다르다) 구조화하는 공허한 점으로서의 천황상에서 끝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절대다수의 일본인들은 공허한 점과 공허한 코스모폴리터니즘 사이에서 진자운동하는 것이 싫어서 지식을 멀리하고 사실상 에도 시대의 연속선상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기층의 사림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조선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그들의 보이지 않는 존재감이다. 조선이라고 왜 급진적 주자학자들이 없었겠는가? 주자학이 중국 사상인 한, 그것을 열심히 공부한 사람 가운데 조광조처럼, 관습과 전통을 황폐하게 쓸어버리고 살풍경 위에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사람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송시열이라고, 정철이라고 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들이 주자학 소양이 윤휴나 조광조보다 부족해서?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들 아래 무수한 기층 사림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층 사림들은 자신들의 마을에서, 역시 스스로를 사림이라고 부르는 자신의 친족과 경쟁 친족과 또 다른 떠돌이들과 함께 서로 우물물 쟁탈전 같은 고래의 민속을 되풀이하며, 멍석말이를 인의라고 하고, 술 취해 저지르는 범죄를 선비의 기풍이라고 부르면서도 일말의 모순도 느끼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고, 또 그러다 서울에 온 무수한 사림들은 자신들의 좋았던 옛 시절과 그 옛 시절 함께 하던 벗들을 결코 잊지 않는데, 이 모든 것에 철퇴를 가하려는 조광조 같은 인물이 살아남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오직 보편주의적 휴머니즘만을 믿게 된 민중-사림의 음주가무는 훌륭하다. 법가 아래에서 기계처럼 변해버리지 않고, 또 상자에 갇혀 이지러지지 않는다. 서구인들이 좋아하는 아방가르드한 예술은 물론 중국과 일본이 각자의 이유로 잘 한다. 조선인들은 예술도 공산유신처럼, 장기-보수적 하향평준화처럼 한다. 보고 들으면 100년도 훌쩍 지나가며(조선인은 이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일본인은 이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있다. 우라시마 타로 설화를 참고), 정신 차려보면 모두 평등하게 어우러져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다! 바흐친은 라블레론에서 억지로 중세르네상스 민중문화가 역사의 발전을 반영한다고 썼는데, 내가 보기에 그러한 민중문화의 귀결은 조선적 하향평준화일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게 바흐친의 조국인 소련과 위성국가들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라지기 전까지는 100년, 아니 영원 그 자체라고 해도 무방한 시간 동안의 즐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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