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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aleopard May 12. 2024

나카에 조민의 규슈 순례

나카에 조민은 1882년 10월 12일 『자유신문』객원에서 사퇴하고 출판사 설립 동지를 모으기 위해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서쪽으로 떠난다. 


바로 직전에 조민은 자유당 인간들한테 시달리느라 고생을 좀 했다. 자유당은 다름 아닌 그의 고향 선배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고토 쇼지로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구사족들 가운데 비폭력 합법 투쟁을 통해 메이지정부를 비판하고 의회제도를 도입할 것을 주장했던 일본 최초의, 아니 동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정당이다. 

1880년과 81년에 이 고치 민권파가 추진한 국회개설운동은, 보신전쟁 당시 정부군에 의해 유린된 동북의 지사들과 그들을 유린한 당사자였던 이타가키 세력이 힘을 합침으로써 전국적인 민권운동으로 거듭났다. 

1881년 소위 메이지 14년의 정변에 의해 정부 내 오쿠마 시게노부 세력이 축출되자, 오쿠마파와 이타가키파가 처음에는 연대하는듯 싶더니 이내 맹렬히 서로 갈등하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정부 돈을 받아서 유럽시찰을 떠나게 된다. 

중차대한 시기에 재야당 당수가 정부 돈을 받아서 유럽에 놀러간다고 하니 당연히 엄청난 반발이 당내에서 일어난다. 

조민은 이타가키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입장이 난처해진다. 이 소위 '외유 문제'로 인해 바바 다쓰이가 이타가키파와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된다. 

이 당시 정부 밀정의 보고서에 의하면, 이타가키가 조민에게 오쿠마파 비판을 의뢰했는데 조민이 거절해서 조민과의 사이에도 틈이 생겼다고 한다. 


아무튼 조민은 저 복잡한 상황을 아예 떨쳐버리고 단신으로 규슈로 떠나버린다. 요코하마에서 오사카를 거쳐 10월 26일 고치에 도착. 고향에 1개월 머무르고 다시 떠나 12월 8일 규슈 도착. 12월 11일에는 구마모토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구마모토 실학당, 상애사, 자명회 등 단체들과 회합한다. 도쿠토미 소호도 이 때 만난다. 

조민이 규슈의 지사들과 만난 것에는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규슈는 본래 우리가 상상하는 '우익'의 본산이며,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관계가 깊은 동네다. 악명 높은 현양사가 바로 후쿠오카에서 발원했다. 

시기도 절묘했다. 1882년 7월부터 8월까지 임오군란의 정세가 이어진다. 당시 일본의 민권파는 대체로 개입하지 말자는 주장을 했고 조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묘하게 점점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것은 어째서일까? 나는 자료가 없고 연구를 찾아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추측컨대 임오군란 이후의 일련의 상황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임오군란 이후 박영효와 김옥균이 일본에 자주 건너온다. 또 갑신정변의 사전작업들이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김옥균은 재야민권파를 많이 만났다. 조민과도 만난 모양이다. 

결정적으로 1884년 8월에 청불전쟁이 있었다. 청불전쟁은 김옥균으로 하여금 갑신정변을 결단하게 할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도 청불전쟁에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어째서인지.. 아무튼 김옥균의 결단에는 일본 지식인들과 어느 정도 연동된 정세 파악의 틀이 전제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정세 변화보다도,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사실 조민은 1877년에 사이고 다카모리의 힘을 빌려 정부를 전복하겠다는 음모에 동참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가쓰 가이슈, 시마즈 히사미쓰 등과 접촉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어쨌든 대망은 수포로 돌아갔다. 세이난전쟁이 마무리된 직후 프랑스에 유학 중인 친구 사이온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조민은 자신이 마른 나무처럼 변해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낙담했다는 것이다. 

낙담해서 번역과 학교 운영에 힘 쓰는 조민. 사이온지가 귀국한 후 언론사를 해보려 하지만 그것도 잘 안 된다. 그러던 차에 규슈에 가서 규슈 지사들과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의외로 말이 통하는 것이다. 사실 도쿄에서 조민이 정말로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의외로 많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시마즈조차 조민의 생각에 올라타주지 않았다. 기껏해야 가쓰 가이슈? 그러나 가쓰는 나이가 너무 많다. 조민에게는 어떤 불온한 생각 주머니가 많다. 그러나 그걸 꺼내서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가 초혼사에서 봤던 귀신은 사이고 측에 섰던 귀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규슈에 가니 자기는 불온한 것도 아니었다! 규슈에서 뭔가 정말 말이 통하는 사람들, 이상한 사람들을 잔뜩 만났던 게 아닐까? 왠지 그랬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에서 꾸물대며 삿쵸에게 당하고 사는 것보다는 대륙으로 건너가서 국사범이 되는 게 낫지 않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만 모인 장소에서 어쩐지 속이 탁 트였던 건 아닐까? 이 시점, 조민의 삶에는 어떤 난폭함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왜 이런 생각을 하냐면 내가 작년에 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조민의 규슈 순례를 읽다보니 왠지 내가 아언문 학파를 만난 것이, 조민에게 규슈 오토코들을 만난 것과 같은 그런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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