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눈부신 친구/엘레나 페란테/김지우 옮김/한길사
<나의 눈부신 친구/엘레나 페란테/김지우 옮김/한길사>
십여 년 전에 추억의 명작 만화 영화 '빨강머리 앤' 시리즈 50편를 밤을 새서 모두 본 일이 있었다. 빨강머리 앤은 어린시절 티비에서 가끔 보았었는데 그때는 산과 강으로 놀러다니느라 워낙 바쁘신 몸이었기 때문에 듬성듬성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에 가끔 보았던 이 만화영화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마도 그때 나는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반드시 이 만화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꼼꼼히 챙겨 보리라 굳게 마음 먹지 않았을까. 구체적으로 결심을 한 것이 아니라면 나도 모르게 내 무의식에 저절로 각인이 된 건 아닐까.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직장 초년생 시절, 드디어 어린 시절에 무의식에 오래도록 깊이 묵혀 두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기억이 작동을 시작한 건지 어떠한 계기를 통해서 나는 문뜩 운명처럼 빨강머리 앤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컴퓨터로 앤 시리즈 50편을 다운로드를 통해 운좋게 입수했다. 토요일 퇴근 후 자취방으로 곧바로 돌아온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이 애니메이션의 1장부터 보기 시작했다. 오후의 졸음도 이날 만큼은 나를 방해하지 못했고, 나의 집중력은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꼬박 날밤을 새면서도 나는 지치지 않았다. 결국 다음날 점심 무렵에서야 마지막회까지 다 볼 수 있었다. 오롯이 앤과 함께 했던 주말 동안 나는 행복감으로 충만했었고 그때의 잔잔한 슬픔과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감정으로 고이 간직하고 있다. 이후 앤의 여운은 오래도록 지속되면서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결국 나는 몽고메리가 쓴 원작소설인 '그린게이블즈의 앤'에까지 손을 뻗치고 말았다. 원작 소설을 읽으면서 알게 된 점은 책에 나오는 대사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만화영화에 모두 나오며, 여러 장면과 이야기에 대한 묘사는 만화가 오히려 책보다 더 상세하고 생생하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원작소설보다 일본에서 1979년에 만든 이 추억의 명작 애니메이션이 더 좋아졌다. 지금은 다운로드 파일이 아닌 정식 dvd로 소장하고 있으며 이것은 언제나 나를 뿌듯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소설 '그린게이블즈의 앤'이 총 10권이나 된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일본에서 만화로 만든 건 1부였던 것이다. 앤을 너무나 좋아해서 쉽게 떠나보낼 수 없었던 내가 어찌 2권을 그냥 두고만 볼 수 있었겠는가. 나는 2권을 기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그러다가 결국엔 5권쯤에 가서 읽기를 그만 두고 말았다. 장편 소설에 대한 인내심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앤이 결혼해서 아기를 낳고 아들이 커서 장성하고, 군에 가서 전사하고…뭐 대충 이런 내용들로 기억하는데, 내가 그동안 좋아했던 앤은 길버트와 결혼을 해서 아이를 여럿 낳은 아줌마 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나는 앤을 순수하고 밝고 명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와 소녀로만 간직하고 싶었다. 성인이 된 앤은 더이상 나의 관심과 애정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아마도 몽고메리는 1권을 완성본으로 썼는데 이 소설의 인기가 많아지자 그 명성에 기대어 연작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다. 결론은 앤의 이야기는 1권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2~10권은 없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순전히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다.
'나의 눈부신 친구'가 나폴리 4부작 연작소설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뒤늦게 책 표지를 살펴 보니 왼편 상단에 아주 작은 글씨로 '나폴리 4부작 제1권'이라고 적혀져 있었다. 이건 뭐 상품 광고할 때 부작용이나 불리한 내용들은 깨알같은 글씨로 저 구석탱이에 보일듯 말듯 적어놓은 것과 비슷하지 않는가. 보통 연작 소설은 큰 숫자로 제목 옆에 표시하지 않나? 제목과 표지로만 봐서는 4부작 연작 소설임을 알 수가 없다. 나는 이 소설이 4부작 중에 1권이었다는 사실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결코 이 책을 고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여러 연작 소설을 읽었을 때는 언제나 그만한 동기와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었다. 그리고 확실히 검증된 책이어야만 했다. 모든 상황에서 보자면 지금은 연작 소설을 읽기에 적당한 때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초기에 나처럼 장편 연작을 까다롭게 선택하는 독자들을 염두해 두고 표지를 이렇게 디자인 했을 수도 있겠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비록 연작 소설이지만 앤처럼 첫번째 책만 읽어도 충분하니 너무 연작이라는 틀에 집착하지 말고 그냥 읽으라고... 혹시나 싶어 인터넷을 뒤져보니 제4권은 우리나라에 최근에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1권부터 4권까지 한꺼번에 출판된 것이 아니라 시간적 간격을 두고 출판되었던 것이다. 이렇다면 내 짐작이 일정 부분 맞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1권을 다 읽고 나니 '그린게이블즈 앤'이 생각났다. 앤은 나에겐 한 권만으로 충분했다. 나머지 시리즈는 차라리 안 보는 게 더 나을 뻔했다. 그래서 이 책도 눈부신 친구편만 읽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마지막에 나쁜 놈 마르첼로가 릴라가 만든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이 눈에 밟혔다. 이건 뭐 대놓고 다음 편을 읽으라고 낚시질을 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라고 나는 성인이 된 릴라가 왠지 불행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고, 어른이 된 그녀의 인생에 더이상 관여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빨강머리 앤과 표지까지 들먹이며 1권에서 그만 멈추고 싶은 내 심정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내가 마르첼로의 구두로 인해 증폭된 궁금증을 쉽사리 떨쳐낼 수 있을까.
인터넷으로 이 연작 소설 책들을 검색해보니 4부작 책들의 표지는 가히 미술작품처럼 예뻤다. 표지로만 봐서도 충분히 소장 가치가 있어 보였다. 시간이 좀 지나서도 나에게 릴라와 레누의 유년에 대한 기억과 성인이 되었을 때의 궁금증이 남아있다면 나는 아마도 나폴리 4부작 연작 소설들을 모두 소장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책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볼까. 뭇 남성들이 모두 레누보다는 릴라를 좋아하고 쫓아다녔듯이 나 역시 릴라가 좋았다. 그녀의 강자에 대한 꿀리지 않는 용기와 솔직함, 타고난 명석함과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아름다운 외모까지 겸비한 그녀에게 반하지 않을 남성이 어디 있겠는가. 이건 남성이라면 본능으로도 끌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반면 레누는 마치 영화 아마데우스의 열등감의 화신인 살리에르를 보는 듯했다. 릴라를 선망하며 그녀를 흉내내는 레누가 애처롭기도 했지만 릴라처럼 순수하지 못하고 늘 잔머리를 굴려대는 레누가 내 마음엔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레누가 나쁜 아이라는 뜻은 아니다. 충분히 착한 아이다.
다른 이에겐 그다지 큰 반전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최고의 반전은 이 책의 제목인 '나의 눈부신 친구'가 릴라가 아니라 레누로 언급되고 있는 장면이었다. 더구나 이 말이 릴라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는 사실이 신선했다. 그동안 레누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릴라의 이 한마디로 나 역시 레누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는 듯한 경이로운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릴라처럼 레누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대단하지 않는가. 릴라는 이런 여자다. 릴라의 말 한마디로 인해 나도 레누를 좋아하게 되다니 말이다.
이탈리아 소설은 이 책이 처음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나마 그 동네와 좀 가깝다는 것 말고는 그동안 나는 이탈리아 문학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읽은 첫 이탈리아 작품으로는 대단한 수작이다. 작가의 문체도 어렵지 않아서 잘 읽혔고, 작가 특유의 독창적인 문장들을 보는 즐거움도 있었다. 번역도 너무 자연스럽게 잘 되어서 읽는 내내 별다른 불편함이 없었다. 여러 집안들과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인물들 각각의 개성이 이야기를 통해서 생생하게 살아나기 때문에 나처럼 기억력이 떨어지는 사람도 인물들을 기억해 내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이 또한 작가의 탁월한 능력일 것이다.
할 이야기가 많았는데 지쳐서 더는 못 쓰겠다. 나에게 글로 쓴다는 것은 언제나 힘든 고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