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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책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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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정 Jul 17. 2024

장마철 비가 그치고 산책하기

비 오는 날 지렁이의 입장이 난처한 이유

나는 경기도의 1기 신도시에 산다.
비록 인공적으로 계획된 도시지만 녹지비율도 높은 편이고, 공원도 많아 산책하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서 오랫동안 살고 있다.

나는 틈이 나면 비가 그친 후 집 근처의 공원에서 산책을 즐긴다. 평소에도 쾌적한 편이지만 비가 그치면  깨끗하게 리셋된 것 같아 산책하기 좋은 날씨가 된다.

공원의 산책길은 보도블록길과 흙길 그리고 아스팔트길로 구분되어 있다. 비 온 뒤에 산책하다 보면 지렁이들을 자주 마주친다.

특히 비가 온 뒤에 많이 보인다. 이때의 지렁이들은 크게 세종류다. 흙을 찾아 이동 중인 지렁이, 몸에 물기는 있으나 부상 등을 입어 일부 훼손된 지렁이, 그리고 이미 죽은 지렁이다. 이미 죽은 지렁이는 어쩔 수 없지만 다른 두 가지 경우에도 이들이 생존할 확률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비가 그치면 나처럼 산책 등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쯤 훼손된 지렁이들도 많이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생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판단되는 지렁이가 보이면, 이들을 나뭇가지로 집어서 도로에서 흙으로 보내준다. 비 온 뒤에는 나뭇가지 항상 옆에 많이 떨어져 있어서 마치 지렁이 옮겨주라고 하늘에서 보내준 것 같다.

내가 비가 그친 뒤 산책을 하는 목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건강을 위함이다. 잘 계획된 도시의 쭉 뻗은 길과 그늘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가로수는 일정한 속도로 걷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다른 하나는 바쁜 일상에서 한가로운 여유를 찾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서는 가능한 주변의 사람들의 표정이나 행동을 의식하지 않고 가능한 나만의 속도로 천천히 걷는다.  그러면 비로소 자연만이 느껴진다. 바람과 햇빛을 느끼고 나무나 새들을 본다. 도심에서 자연을 느끼고 하루의 일상에  작은 활력을 느끼는 순간이다.

그리고 비 온 다음날의 산책은 특별한 청량감이 있다. 이런 것을 누린다는 것이 좋다.

그러나 비 온 뒤 도심의 도로에서 위험에 처한 지렁이를 만나는 것은 뭔가 자연의 원리에서 위배된 느낌이 든다. 자연에 인공적인 계획이 개입하여 피해를 보는 지렁이가 안타깝다. 이런 도로를 내지 않았다면 지렁이는 위험에 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도 어쩌면 이런 미안함 때문일 것이다.

지렁이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나 지렁이 모두 같은 지구에서 주어진 기간 동안 살 수 있도록 선택받은 동물이다. 그런데 인간을 위한 도로가 깔리면서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무참히 짓밟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런 난처한 입장에 처한 동물은 지렁이뿐만 아니라 더 많을 것이다. 매년 10월 4일이 세계동물의 날로 지정되었으니, 단 하루만이라도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어린이들의 교육과정에도, 이런 현상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 주면 좋겠다. 그러면 비 온 뒤 지렁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이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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