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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인 Apr 13. 2024

방랑자 I



 습작을 할 때 말도 못 하게 더디다. 얼마나 더딘지에 관해 쓴다는 것이 지금 망설여질 정도로. 써온 부분에서 맞춤법이나 작은 말투까지 완벽히 맘에 들기 전까지는 한 자도 더 쓰고 싶지 않은 편집증적 성향이 있기도 하거니와, 감정의 독 안에 빠진 사람이 되어 각 구절과 구절로부터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르를 불문하고 스스로에 관한 이야기를 곧잘 쓰는 글쓴이로서, 나 자신으로부터 건져 올린 조각들을 보고 이렇게 벅차하는 사실이—기쁨과, 감당하기 어렵다는 의미 둘 다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이상하기도 하다. 결국 이런 식으로 꺼낼 줄 몰랐지만 줄곧 열망해 왔던 행위라는 사실을 알아챔과 동시에, 마주한 텍스트와 주변 풍경의 유려함이 느껴지면 슬프게 감동하는 것 같다.       


   

 제주에 다녀왔다. 살아오며 타지에서 머문 가장 긴 시간이었다, 기쁘게도. 글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고 떠난 첫 여행이기도 했다. 어떤 식으로든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마음을 먹은 이후, 아름다운 장소에 가게 되면 종일 낚싯배 갑판 위에 묶인 사람처럼 문학적인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 나의 태도였는데 이것을 그만두기로 한 것이다.          



 그간 나는 ‘삼다도’의 의미에서 여자 부분에는 공감하고 있지 못했다. 말이 그렇지 과학적으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히, 어부들이 항구 등지에 주로 머물러 적게 보이는 것이겠지만서도, 제주의 작은 항구마을 시가지 거리 위 할망들은 마치 섬의 유일한 사람들 같은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기운은 내게 특별했다. 누군가의 기운은 내면의 역사와 외부 환경의 역사가 만나는 곳에서 형성된 균형점이랄까 하는 것이 형형하게 뿜어져 나와 다른 사람에게까지 닿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글을 쓰고 싶지 않아 진, —휴식의 개념을 넘어서서 반발심이 있었다. 글을 쓰고 싶지 않게 되는 이유는 다들 잘 알 것이다. 쓰는 일은 알고 보면 누군가에게 읽히는 일이었고 독자들은 기대했던 것보다도 많은 말을 내게 건네주었다. 이따금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난데없는 매듭 혹은 엉킴이 일어났고 그것이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하기 위해 방대한 분량의 시간여행도 불사한다. (이 행위를 매분 매초마다 반복하는 사람도 있다.) 취약한 기억의 다리 위에서 형성한 감상평들을 마치 재개발구역에 들어선 건설업자라도 된 듯이 내게 말해올 때, 스물한 살의 나는 그것들을 다룰 재간을 찾는 데 실패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족족 내 자신의 가장 어두운 면과 꼭 맞아떨어져 떨쳐낼 수 없던 것일까. 특히 누군가의 슬픔과 직결된 반응은 나로 하여금 무거운 마음의 중심부를 감당하게 만들었는데, 글을 쓰는 스스로를 점점 끝으로 몰아넣어서, 산책하듯 글쓰기를 즐기던 나는 이제 보행로가 아닌, 벼랑이나 더 이상 알 수 없는 곳에 서 있게 되었다.— 소침한 아이에게 자꾸 다가오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할망…. 동네의 할망들은 내가 (마음 또한) 빈곤한 걸 알아차렸는지 점심 일에 나서기 전 버스 정류장 유리 안쪽 편에서 신문지를 깔고 앉아 삶은 달걀과 빨갛게 무친 나물을 나눠 드시다가 나에게 권하기도 했다.



(2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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