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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로예 Mar 23. 2024

 오늘 어디 가세요? 1-2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밥을 더 먹고 싶어도 안 먹는 일을 시작했는데, 그 시기에 ‘몸매가 안 좋다’는 개념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병원에서 내게 소아 다이어트를 권장한 적도 있었는데, 지금 최대한 세밀히 기억하려고 노력해 본다면, 나는 전혀 ‘과체중’이 아니었다. 근육에 비해 지방이 많아 문제였다고 하더라도 키가 멈추기 전에 식사량을 줄이는 선택은 건강과 하등 상관없는 행위였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키가 자라기는 했지만 중학교 때까지 놀라울 정도로 체구가 자그마했었다.       


   

 ‘치팅 데이’를 제외하고 내가 먹고 싶을 때까지 먹는 환경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종종 ‘할머니 댁’에 가서 지내는 것으로 비유되는, 음식을 마치 물과 같이 대하는 영양 충분/과잉의 상황 말이다. 그로부터 10년, 내 인생의 첫 ‘할머니댁 환경’은 바로 제주에서 이루어졌다. 우리는 같은 식당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숙소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숙소 바로 옆의 식당과 배달 음식, 포장 음식, 양껏 요리한 음식 사이의 사이클로부터 벗어나는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혼자였다면 절대 먹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여행지 특유의 맛있는 음식 향연 앞에서 스스로 온도를 낮춰, 이를테면 운동의 강도를 높이고 한 두 가지 음식 재료만 먹으면서 아주 차가워지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아무도 근무하지 않는 일요일에 우리는 아주 게을렀다. 정오에 기상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새벽까지 어떤 이야기를 하면서 물을 과다섭취한 것을—우리 중 누구도 술을 잘하는 사람이 없었다— 서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행지의 단체생활에서 개인의 생활력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할 때, 유일하게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건 게으름이다. 다른 모두가 오전 대여섯 시부터 분주하고 하루의 일정이 이미 결정되어 있을 때, 내일 어디를 갈지 제대로 못 정한 채 새벽 늦게 잠들어 열한 시쯤 눈이 떠진 사람은 아침부터 바깥이 시끄러운 것을 내내 느끼다가, 하루가 동강이 난 느낌으로 일어나야 한다. '오늘 어디 가세요?'라는 질문은 대답하기 가장 곤란한 질문이다. 나도 모르는 데다 아직 알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     


     

 반면 게으름이란 이 숙소의 좌우명에 가까웠다. 그런 공간에서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걸 먹는 건 당연하다. 파트너를 찾거나, 아니면 다 같이 무엇을 먹기로 추진하기가 용이한 면도 있었지만, 가만 보면 다들 혼자의 배달도 서슴지 않았다. 초밥 일 인분 같은 것. 집 근처의 초밥 일 인분 배달 식당이 그다지 맛있지는 않았지만 그런 아침(=점심)이나 저녁을 누릴 수 있는 사실이, 충분하다는 감각을 주었다. 네가 없어도 충분하고, 있을 때 소중함 그 이상이고, 서슴없이 충분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하루가 돌보아지는 것. 언젠가의 우리는 점심에 배달을 시켜 먹었고, 오후 다섯 시쯤 요리하려고 계획해 두었던 것을 요리했으며 그리고 또 생각이 나서 새로운 것을 요리했으며 근무하던 식당의 주방장님께서 음식을 해서 가져다주셨다. 그걸 모두 먹은 하루… 무지 게을렀다. 기본적으로 주말에 아무도 여행을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있다. 온종일 비가 얕게 내리는 날이었다. 비가 오는 겨울 제주의 날씨는 자가용 없이 다루기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아쉽게도 여행을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그 주 내내, 주말에 비가 오는 사실을 가지고 떠들었던 일도 알고 있다. 그날 무슨 요리할까, 나갈 수가 없겠다, 그치…….          



 프랑스 파리 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기억을 꼽자면 ‘도시민의 문화’ 같은 것이 남아있다는 점이었다. 대중교통 안에서 아무도 빤히 쳐다보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건 넋을 놓은 느낌이 아니라, 주변 상황에 시각과 청각이 열려있으면서도 상대에게 절대 어색함을 안겨주지 않으려는 의식적 행동이 단체로 이루어지는 것에 가까웠다. 다들 어딘가 먼 데를 응시하다가도, 노약자나 아이가 타면 최선의 도움을 재빨리 주는 것이 증거였다. 사실상 자리가 필요해 보인다든가 하는 미묘한 상황에서도 도움은 늘 유효했다. 때문에 나도 문열림 버튼을 누르지 못해—한국 지하철에는 없는— 하차하지 못할 뻔했을 때, 거의 위기를 느낄 새도 없이 상황을 알아챈 다른 시민이 달려와 문을 열어주어서 무사히 내릴 수 있었다. 많은 짐을 들고 계단을 내려갈 때도 내 쪽에서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을지 살피는 눈길을 다수로부터 받는 일이 일상적이었다. (따뜻함!) ‘도시민의 문화’가 시혜나 매너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도시의 절대적 요소라고 느낀 때는, 내가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길 위의 남성 여행자로부터 간단한 질문을 받아 원치 않은 대화가 시작되었을 때였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한 번씩 남성을 주시하고 지나갔고 주시가 늘어날수록, 몇몇 남자들이 걸음을 멈추고 살필수록, 온갖 말을 주절거리던 중년 여행자는 점점 작게 위축되더니 황급히 대화를 종료했다. 나는 늘 일종의 수호를 받고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2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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