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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핀름 Aug 26. 2024

<존 오브 인터레스트>:귀로 보는 세상, 암흑 속 희망




1. 화려한 평화, 그 속의 진실


    영화는 소리로 시작한다. 환호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음, 무언가 터지는 소리, 왁자한 듯한 소음들… 이어서 보이는 화면은 놀라울 만큼 고요하고 평화롭다. 끝없이 이어지는 비명과 고통의 소음이 백색소음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 순간, 관객은 관조자가 된다.

    영화의 주인공, 회스 장군의 집은 수용소 바로 바깥에, 담 하나만 두고 존재한다. 우리가 청각으로 아우슈비츠의 장면을 보는 것처럼, 영화가 시각으로 보여주는 고요하고 화려한 일상의 이미지는 수용소에 갇혀있던 사람들에게 청각의 이미지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시각은 우리를 속이고, 청각은 잔인한 현실을 보여준다. 회스 가족 중 가장 늦게 태어난, 어린 막내의 울음소리와 수용소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는 영화 내내 겹쳐 들린다. 그리고 관객들은 러닝타임 내내 그것에 익숙해진다. 이 익숙함을 영화는 의도했을까? 영화 초반에, 그리고 중간중간 틈틈이 나오는 독일인 아이들의 웃음 소리와 물장구 소리는 담 너머로 얼마나 날카롭게 박혀들었을까. 아마 총칼보다도 더 날카로운 소리였을 것이다.





    회스 부인이 가꾸는 정원은 집을 방문한 어머니가 탄성을 내지를 정도로 아릅답다. 카메라 앵글은 아름답고 선명한 꽃에게로 향한다. 눈이 부실 만큼 선명한 꽃잎을 지나고, 지나고, 지나서… 겉보기에 아름답기만 했던 꽃의 깊고 어두운 내면에는, 검은 어둠이 있다. 그 꽃의 비료는 수용소에서 타 죽은 수많은 유대인들의 유골임이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심지어 영화 후반부에, 유대인 사용인이 정원에 아직 열이 채 식지도 않은 비료를 주는 장면까지 삽입되어 있다. 여러 버전인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포스터 중 하나가 이 꽃인 이유는 바로 그 어둠이다.







2. 어둠, 그 안의 희망





    영화는 화려한 일상 속의 어둠을 청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실제 스크린 속의 어둠은 조금 다른 형식으로 다루기도 한다. 바로 핀란드 소녀가 나오는 장면이 해당 부분이다. 어둠 속에서 자전거를 타고 밖으로 나선 소녀는, 주변을 살피면서도 계속해서 빵이나 사과 같은 먹을 것들을 유대인들이 일하는 구역에 숨겨둔다. 그 작은 희망이, 꺾일 듯 연약한 용기가 수많은 유대인들을 살렸다.

    감독은 영화와 관련해 인터뷰하며 해당 장면을 열화상 카메라로 찍은 이유에 대해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선한 힘”을 표현하기 위함이라고 인터뷰한 바 있다. 동시에 이 장면은 모두가 보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만 그녀가 수감자들을 도울 수 있었던 상황을 단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어두운 곳에서 더 밝게 빛나는 반딧불이처럼, 소녀는 영화 속에서 선명하게 빛난다.


    보통 영화에서 어둠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상징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유발한다. 그러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다르다. 열화상 카메라로 찍은 두 번의 핀란드 소녀가 용기를 낸 장면이 부정적인가? 영화 내내 보여주는 빛나는 여름 휴가와 같은 아름다운 장면들이 오히려 더욱 끔찍하고 역겹다. 가장 어두운 화면 속, 빛나는 소녀만이 오히려 대비되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내 눈을 믿어서는 안 되는 영화다. 러닝타임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관객은 나의 눈이 나를 속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밝고 아름다운 영상 속에서 역겨움을 느끼는 동시에, 가장 어두운 장면에서 아름다운 희망을 발견하는 모순이 생겨난다.



    타죽은 유대인들의 시체를 먹고 자란 꽃들. 그 속으로 카메라 앵글이 들어갈수록 어둡고 징그러운 이면을 보여주듯, 또 한 번 이미지가 반전되는 중요한 장면이 있다. 바로 회스 장군이 영화의 후반부, 파티에 참석한 후 구토하는 장면이다. 





3. 지금, 여기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


   


 영화 후반부에서 장군은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열망으로 군 내부의 인정을 받아낸다. 동시에 지키고자 했던 아름다운 저택, ‘아우슈비츠 옆의 저택’으로 돌아가게 된다. 복귀 소식을 들은 후 참석한 파티에서, 장군은 다른 어떤 생각도 아닌 그 곳의 모든 사람들을 ‘죽이는 방법’에 대해 생각한다. 아무런 죄책감도, 이질감도 없이.

    그 이후 계단을 통해 장군은 밑으로 점점 하강한다. 파티장 위에서 파티장 전경을 한눈에 보던 장군은 하강할수록 점점 어둠이 깔리는 공간에 위치하게 된다. 마침내 거의 어둠에 다다랐을 때, 구토한다.

장군이 계단을 내려가다가 복도 너머를 바라보고, 어둠이 짙게 깔린 공간의 끝에서 현대의 아우슈비츠 박물관으로 장면은 전환된다.



    


여기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다른 홀로코스트 영화들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그 시절의 아우슈비츠는 복도 끝, 가장 어두운 지점에서 현대와 이어진다. 그렇다면 왜 하필 ‘현재’가 아우슈비츠 박물관, 그것도 청소하는 시간이었을까?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이들의 과오를 전시해 놓은 곳을 청소하는 청소부들은 모두 여자다. 아우슈비츠를 모른 척, 두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권력을 누린 회스 장군과 가족들은 완전한 상위 계급이다. 그러나 그들의 과오를 간직한 공간을 치우는 이들은 여전히 하위 계급이다. 여전히 그 일을 기억하고, 치우고, 청소하고, 잘 보일 수 있도록 닦아내는 사람들은 영화 속 핀란드 소녀처럼 아주 한미한 계급의 노동자들이다.



    


    회스 장군의 구토는 이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가 앉아 있는 높은 자리는 학살, 나아가 학살된 이들의 뼛가루로 만들어진 계단이고 사실상 얼마든지 내려올 수 있는 곳이다. 장군이 발령나고, 복귀하는 과정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위태롭고 유한적인 그 계급은 사람을 학살함으로써 유지된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계단을 내려온 뒤 구토하는 회스 장군의 모습인 것이다. 

    영화에서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립이다. 회스 장군이 바라보는 어둠의 끝에서, 어둠과 빛은 반전되며 어둠-빛의 부정적인 관계나 두려움의 개념이 전복된다.

과연 그렇다면 혐오 범죄와 전쟁이 끝나지 않는 현재의 우리는 어둠의 끝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그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찾을 수 있는 희망과 따스함은 전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지만, 그러나 그 다정함과 희망은 분명 존재했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것이 중요하다. 어둠 속에는 희망이 있다. 어둠 속에는 진실이 있다. 희망의 대척점에는 어둠이 아닌, 화려하고 밝아 보이는 귀를 막은 이들의 삶이 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시각적인 영화가 아니다.

    이제 당신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눈을 감을 것인가, 귀를 막을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어둠 속에서도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Editer: 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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