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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wBreasts Jul 12. 2024

8. 서울대는 못 갔어도 서울대 병원엔 가고 싶다.

part1-암은 내 가슴에...

서울 대학교는 못 갔지만 서울 대학교 병원으로 전원을 결정했다.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내가 엄청나게 똑똑한 줄 착각하고 살았다. 그림 그리기 대회나 경필 쓰기 대회, 글짓기 대회에 나가서 타는 상은 나의 재능을 표출해 주는 것이었고, 그와 더불어 상위권의 학교성적과 반장선거에서 어떤 자리라도 꿰찼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때의 담임 선생님들은 칭찬을 그치지 않았다. 어린이였지만 우리 집 안에서 나는 이미 서울 법대에 가야 하는 예비 서울 대학생이었다. 그때의 나는 내가 갈 대학은 서울 대학교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미래는 탄탄대로인 것만 같았다.      


 중학생이 되고 나니 상황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나는 뛰어나게 똑똑한 아이가 아니었다. 서울 대학교는 말도 안 된다는 것은 중학교 때 이미 알아 버렸고, 고등학교 때가 되어서는 상황이 또 달라져 있었다. 나는 뛰어나게 똑똑한 아이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그냥 평범한 머리를 가진 열심히 공부를 해야 그나마 괜찮은 성적을 받을 수 있는 아이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공부를 죽어라 하지도 않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좋아하고 “현진영과 와와”를 좋아하고 “뉴 키즈 온 더 블록”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조금씩 놀기도 하고 동네 인근의 남학교 학생들과 미팅을 하거나 소개팅을 하기도 했다. 두뇌도 평범했지만,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기를 쓰고 노력을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마음은 항상 “열심히 공부해야지”였지만 몸은 친구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나의 인생은 요행을 바라서는 안 되는 인생이었다. 당시에는 내 실력만큼 대학을 가지 못했다고 억울해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나온 대학은 고등학교 시절의 나를 생각한다면 차고 넘치는 대학이었다.   

   

 대학에 입학 후, 대학생이 되어서는 또 딱히 “서울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내가 부러워하는 대상은 인물이 출중하게 예쁘거나 끝내주는 몸매를 가진 내 또래의 여자일 뿐이었다. 어디 대학을 나왔는지가 인생을 크게 좌지우지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특별하게 예쁜 여자나 잘생긴 남자는 뭐가 돼도 되지 않을까라고 짧은 미래만을 보았다.      


 하지만, 직업을 구하게 되면서부터, 회사에 입사를 하고 난 후 보니 “서울 대학교”라는 의미는 내가 어릴 때와 대학생인 시절 알았던 의미와는 상당히 큰 격차가 있었다. “서울 대학교”라는 단어는 대한민국의 머리 좋은 학생들, 최고의 학생들이 가는 명예의 전당이었다. 그러나 몇 년 전, 다른 지병으로 “서울 대 병원”이 아닌 “아산 병원”에서 시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 물론, 훌륭한 의사 선생님을 만났고 편히 입원 생활을 했지만 “암”만큼은 서울 대 병원에서 치료받고 싶었다.      


 그것은, 엄마가 동네 병원에서 위내시경으로 위암 3기 정도로 예측을 받은 후 서울 대학교 병원으로 전원을 하려 했으나 1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결국은 이 병원 저 병원을 알아보다가 @@ 대학교 병원에서 수술과 치료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때는 당장 수술을 하지 않으면 엄마의 암세포가 더 빨리 커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고, 그것은 엄마 본인도 같은 생각이어서 우리 가족은 수술을 가장 빨리 할 수 있는 병원으로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병원의 의료진도 훌륭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1년 2개 월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셨고, 나는 그때 서울 대학교 병원으로 갔었더라면, 한 달을 기다려서라도 갔었더라면 결과가 조금이라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서울 대학교 병원을 택한 큰 이유는 사실 서울 대학교를 못 가서의 이유가 아니라 20년 전의 후회가 원인이었다. 암세포가 1~2개월 만에 전신으로 너무 빨리 퍼지지는 않을 확률이 더 큼에도 그 상황에서는 빠른 치료가 최선이라는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고, 결과가 좋지 않았으니 한 달을 기다려서라도 서울 대학교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입원을 했더라면 운명이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회사 선배가 수술을 받았다는 “이한별”선생님으로 지정하였다. 로컬 병원에서 이렇게 의뢰한 날짜가 4월 28일이었는데 나의 초진은 5월 30일로 잡혔다. 2002년이나 2023년이나 서울 대학교 병원의 기다림은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다.      


 나는 더 이상 27살의 젊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엄마 때문에 암에 대해서 많은 공부를 했었고 한 달이라면 급하지 않게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초진 날짜가 한 달 후라는 말에 가족들이나 지인들은 너무 늦는 것이 아니냐며 도리어 내 대신 걱정을 해 주었지만 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시간이라는 것은 “나에게 암세포가 있다.”를 충분히 덤덤하게 받아들인 상태에서 선생님을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없다면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나를 방문한 원치 않은 불행에 이리저리 이끌려 다닐 것만 같았다. 나는 몸과 마음을 굳게 하고 단단히 해야 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는 그 한 달을 내 온 힘을 다해, 내 온 영혼과 내 목숨을 다 해 마음을 다잡기 위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서울의 낙산 공원이 있다. 아파트 후문에서 걸어 올라가면 낙산 공원이 나오고, 그곳에는 전망대가 있다. 그 전망대에서는 서울 대학교 병원의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암을 진단받기 전에는, 병원을 서울 대학교 병원으로 정하기 전에는 그 광경이 전혀 특별하지 않았고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전원과 초진 날짜가 확정되면서부터 낙산 공원에 올라 서울 대학교 병원을 바라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올라왔다.      


 결국은 나도 피하지 못하고 저곳에 가서 어느 날 수술을 받고, 입원을 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치료를 해야 하겠지. 낙산 공원에서 보이는 병원 건물은 장난감처럼 작게 보였지만 그곳을 바라보면 그 장난감 같은 건물이 생명이 들어간 위대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한 달만 기다려라, 내가 간다. 그때까지 나는 나를 다시 만들겠다.”     

 

 7월 12일 수술을 받기 전까지 나는 그렇게 서울 대학교 병원 건물을 거의 매일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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