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진 마음 위에, 문장을 놓다
시간은 참 빠르게 지나간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 약이 만병통치약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9년, 벌써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고칠 수 없는 병을 가지고 있었다. 좋아하던 달리기도 못하고, 체육시간엔 늘 혼자 앉아있던 그 녀석이 말이다. 바쁘게 살고, 스스로를 자책하느라 잊고 지낼 때도 있었지만 지독한 5월, 녀석이 떠나버린 5월이 되면 나는 다시 가라앉는다. 떠나보내지 못해서,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나는 한참을 슬픔에 잠기게 된다.
그 녀석을 처음 본 것은 중학교 때, 학원을 다니면서다. 알고 보니 같은 학교였고, 중학교 3학년 때는 같은 반이 되었다.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늘 같이 다녔다. 심장이 좋지 않았던 녀석은 두 달에 한 번씩 서울에 진료를 받으러 갔다. 약이 지독했던 모양이다. 많이 먹어도 살이 하나 붙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야위어갔다. 사실 녀석의 아픔을 공감해주진 못했다. 그저 같이 있는 것이 즐거웠고, 영원히 함께 우정을 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 녀석이 가진 병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었나 보다.
그 녀석과 가깝게 지내다가 한 달 정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과 술 마시러 다니기 바빴던 어린 시절의 나는 그 순간을 가장 후회한다. 녀석에게 전화가 왔었는데 받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 전화였던 것도 모르고. 다음날 갑자기 생각나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았지만, 녀석이 아니었다. 녀석의 아버님이었다. 아버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잘못들은 것 같았다. 아니, 무슨 꿈을 꾸고 있나?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녀석이 죽었다. 녀석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녀석의 얼굴도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게 되었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지독한 술, 문제가 되던 술을 매일 마셨다. 학교도 잘 나가지 않았고, 다니던 정신과도 잘 나가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가치 없게 느껴졌다. 내 인생마저도 가치가 없는 것 같다. 항상 내가 그리던 미래에 서있던 사람이 사라졌다. 이제 그 미래를 그릴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뭘 하고 싶었더라? 나는 뭘 하면 즐거워했더라. 잘 생각나지 않았다. 스스로를 해치는 법 밖엔 떠오르는 게 없었다. 겨우 살아보겠다고 다시 정신과에 갔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또다시 병원을 가다가, 가지 않다가, 스스로를 해치고 망치다가… 하루가 다 지났다. 나는 내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고 빌었고, 죽지 못해 살았다.
이룬 것 없이 7년이 흘렀다. 겨우 살아내고 있다. 나는 다시 꾸준히 병원에 나가는 것부터 시작했다. 많은 것들이 망가져 있었지만 전부 내 모습이었기에 두고 갈 수가 없었다. 계속 내 발목을 붙잡는 것들만 늘어갔다. 그냥 흘러 보낸 시간이 아까웠고, 떠나간 녀석이 미웠다. 그러다 잘못 없는 녀석을 미워하던 스스로를 미워하고, 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처음으로 납골당에 가서 녀석에게 절을 두 번 올렸다. 완전히 보내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저 잊고 사는 것뿐, 완전히 이겨낸 것이 아니었다.
이제 병원도 꾸준히 다니고, 스스로에 대해 잘 안다. 하고 싶은 일들을 시작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9년, 9년이 지나서야 나는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네가 옆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진짜, 정말 너를 떠나보낼 준비를 했다. 기일 당일에 가진 못했지만, 녀석을 보러 혼자 버스를 타고 떠났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는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눈물이 났다. 아직 녀석을 보러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이제 진짜로 가라. 멀리멀리 가라. 그리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라. 이젠 제발 내 곁에서 떠나라. 아주 먼 미래에 내가 보고 듣고 해낸 것들을 자랑하러 갈 테니까. 죽기 위해 열심히 살아서 네게 멋진 모습을 보여줄 테니까.
옷을 한 벌 사갔다. 헌화대에 올리진 못했지만 녀석을 생각하며 옷을 사서 꽃과 함께 보여주고 절을 올렸다. 이젠 진짜 너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었다. 나는 이제 혼자서도 잘 해내고 잘할 수 있으니까. 나 진짜 네 걱정 안 하게 잘할 테니까. 이제 멀리 가라, 좋은 곳으로 멀리멀리 가라. 그저 먼 미래에 그냥 고생했다고 한 번만 서로 안아주자.
잘 자, 내 사랑. 잘 자, 나의 태양.
9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죽기 위해 떠나보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