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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재 Mar 13. 2024

조용한 흥분

고독이 주는 기쁨에 대하여

24년 3월 11일 날씨 흐림.

이러다가 평생이라도 하겠다 싶은 것들이 몇 가지 생겼다. 그림 그리기랑 책읽기, 글쓰기다. 운동은 애석하게도 아직. 셋 다 나 혼자 하는 취미라는 것이 공통점이다. 그리고 특히 독서랑 글쓰긴 같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잘 못하겠다. 하루에 한 줄이라도 글을 써야 하는 나는 그래서 24시간 누구와 같이 있는 것이 버겁다. 하루동안 했던 생각들을 백지에 쏟아내야 하는 습성은 어쩔 수 없이 나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해야 숨통이 트이는 습관을 만들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생각과 나라서 볼 수 있었던 것들에 대해서 적는 시간들은 아무리 길어져도 지루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보다 느끼는 게 많고 생각이 많은 만큼 할 말도 많기 때문이다.


2월, 설날 연휴 이후로 쌓인 사소한 우울감들로 적셔진 하루는 시작하기 무거웠고 오늘은 계속 결심했던 수영도 가지 못해서 하루의 시작이 더 짜증났다. 나랑 함께하는 시간이 지루해진 건 언제부터였던가. 조금의 강제성을 부여해서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아서 씻고 머리를 말리고 화장은 하지 않고 편안한 차림으로 물건들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조금 산뜻해진 공기가 벌써 3월이 되었음을 온몸으로 느끼게 했다. 춥긴 추웠지만 쳐진 일상에 생기를 불어 넣어 줄 만큼의 산뜻함이었다. 얼마 걷지 않아 도착한 스타벅스는 언제나 그랬듯이 사람이 많았다.

넓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지갑을 챙겨 주문하려는데, 점원이 조심스런 얼굴로 말했다. 옆에 취객이 있어서 퇴점 요청을 했지만 조금 시끄러울 수 있다고. 자리를 옮기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사실 상관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너무 친절한 그의 태도에 나는 대접받는 손님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순식간에 차오른 문명시민으로의 고양감을 간신히 누르고 조금은 절제된 태도로 알려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웃으며 답했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사람과의 감정없는 대화와 각자의 할 일 나눌 얘기들이 가득한 공간에 들어오니 나도 내 삶을 열심히 살아내야겠다는 숨겨져 있던 의욕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심스레 가방을 들어 창가자리로 좌석을 옮기고선 충전기를 꽂고, 패드를 꺼내 햇살 밑에서 계획을 짰다. 취객이 내는 소음조차 반갑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너무 신이 났다.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에게 숨겨진 의지를 집앞 5분 거리 카페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를 살아있게끔 만드는 모든 것들이 거기 있었다. 집에 있으면 하지 못하는 생각들. 하고 싶지 않은 생각들이 각자의 고독을 즐기는 사람들 속에 숨겨져 있었다. 내가 우울한 이유는 아마도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모른 척 하고 익숙한 고통으로 회피했기 때문이리라. 스크롤을 내리거나 복층 계단을 왔다 갔다 하는 정도의 움직임이 허용한 세상은 작고 얕았다. 경험하는 것이 전무하니 쓰고 싶은 것도 없었다. 누군가가 씹다 뱉은 껌처럼 단물이 빠진 내 일상은 그야말로 회색빛이었다. 아무 재미가 없었다. 누군가는 취업을 위해 공부하는 삶을 인생의 암흑기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오늘 이 일련의 과정과 며칠 계속되었던 우울과의 차이점을 알았다. 핸드폰 속 세상에 빠져 있던 나의 생활은 내 선택이 아니었고 누군가가 보여주는 세상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구경하는 행위였다. 반면 오늘은 내 의지로 씻고 단장해서 내가 걷는 걸음대로 세상이 나에게 와서 내 일상을 채워주었다. 나는 걷고 커피를 마시고 쓰고 하늘을 보면서도 즐거워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누구와 함께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확인해서, 나는 나 혼자만으로도 너무나 괜찮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어느 때보다 충만했다.


집으로 와서 미뤄뒀던 설거지를 조금 하고 화장실 쓰레기통을 비웠다. 바닥에 있는 머리카락들을 돌돌이로 훔쳤다. 가져갔던 가방에서 노트북과 패드를 꺼내 가지런히 책상에 다시 넣어두고 충전기 선을 말아 책상 옆 협탁에 정리했다. 사람이 사는 흔적을 남기는 일련의 행위들이 괜시리 좋게 느껴졌다. 굳이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던 며칠 전과는 너무나 다른 생각이었다. 하다못해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하기 싫지만 이대로라면 나는 방에 틀어박힌 사람이 될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에 괴로웠으니까. 이렇게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하나씩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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