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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재 Mar 18. 2024

새벽을 유영하는 사람

일기가 아니라 그냥 글을 써 본 적이 언제였는지 가늠하지 못하겠다. 마지막은 작년 10월이군. 잡다한 생각들을 그때그때 써내려갔던 sns의 글들은 휘발성이 강해서 내가 그런 글을 썼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메모 목록들을 보니 작년의 나는 꽤나 슬펐던 것이 분명하구나. 과거의 슬픔을 직면하지 못하고 매번 마음을 내주며 너무 꼼꼼하게 슬퍼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땐 눈 마주치는 모든 대상에 감정을 이입했고 요즘 영화로 비유를 하자면 ‘엘리멘탈’의 웨이드 같았다.


요즘 수영을 하면서 새벽에 사람이 거의 없는 거리를 걸을 때면 이상하게도 불안감보다는 안정감이 느껴진다. 처음 수영을 다니기 시작할 때만 해도 새벽에 밖에 나가기 싫었다. 왜인지 모르게 일상적인 기운이 비워진 거리는 오로지 온도만으로 계절을 감각할 수 있었고 햇빛이 들지 않아 언제 어느때인지와 상관없이 조금은 쳐진 기분을 들게 했다. 수영장에 도착해서 탈의실에 가득찬 다른 사람들과 호흡을 공유하고 나서야 안심했었다. 그땐 참 여러가지로 건드려지기 쉬운 상태였다. 아물지 않은 상처는 막 다쳤을 때보다 더 아프다.


지금은 물에 수십번 나를 빠트리고 호흡하고 걷는 거리보다 수영하는 거리가 더 많아서 그런지, 우울은 수용성이라는 어찌보면 터무니없는 위로의 한마디가 정말 나에게는 효과가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많이 무던해졌다. 어디서 봤는데 이게 정상인의 기분상태라고 했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평이한 상태를 정상적인 상태라고 부른다고. 나는 항상 슬펐고 그런 인생을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예민하고 울적인 내 기질에서 피어나오는 영감들이 예술적으로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이 점점 비워지고 더 이상 새벽이 불안하지 않게 됐을 때 조금은 불안했다. 내 예술적인 자아는 이제 사라지는 게 아닐까? 우울에서 오는 근본적인 인생에 대한 통찰과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은 욕망들이 이젠 바닥을 드러낸 것일까- 하고.


근데 생각해보면 행동이 없는 욕망들은 단번에 사라져버리는 신기루에 불과했다. 뭔가를 하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을 뿐 우울은 결국 나를 행동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오히려 끊임없이 피어나는 잡생각에 비해 최저를 찍은 체력과 의지력이 콜라보를 하면서 좌절감만 늘어갔다. 움직이지도 않고 끊임없이 자기파괴적인 생각과 행동만 반복해버린 몸은 보기 싫게 부피가 늘어갔고 더 이상 나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운동만이 내 일상을 바꿨다고 말하기엔 비약이 큰 거 같지만 진짜 사실이다. 예전부터 수영을 하고 싶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강습을 하는 수영장이 없었고 자유수영은 내 체력으로 한 시간도 채우기 힘들었다. 지금은 삼십 분 만에 1000미터를 돌지만 그때는 하루 500미터도 하기 어려웠으니까. 반 랩 돌고 머리가 어지러웠음. 서울로 이사오고 나서 따릉이가 취미가 되었고, 바깥으로 나돌아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조금 더 잘 알게 되었다. 바깥에서 에너지를 얻는 타입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물론 나도 사람이기에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순간에 나는 낯선 사람들과 얘기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대화를 굳이 하지 않더라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 에너지를 얻는다. 텅 빈 집 안에 있으면 에너지가 계속 고갈되는 느낌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수영하기 싫을 땐 자전거를 열심히 탔다. 점점 내 행동들에 ‘저항’이 줄어들었다. 나는 온갖 핑계로 점철된 종류의 인간이었다. 하고 싶은 것, 해야 하는 것들을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있었고, 그 생각은 내 행동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들을 하지 않아도 되는 핑계들을 생각해내기 시작했다. 나 자신도 모르게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었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변화는 벌어지지 않았다. 변화하지 않는 현실에 비해 내적 갈등은 에너지 소모를 더욱 촉진시켰고, 꿈과 현실의 괴리만 큰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인간이었다.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땀흘리는 것이 좋아졌고, 운동을 하러 가는 과정에서 핸드폰 액정을 덜 보게 되었다. 직접 경험하고 부딪히고 쓰러지면서 지각하는 세상은 훨씬 더 기억에 남았다. 매일매일이 똑같던 일상이 점점 입체적으로 변했고, 나는 그 굴곡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현생이 버거워질 때는 운동을 자연스레 멀리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근데 그 전에 이미 새벽에 운동을 가지 않으면 죄책감이 들고 몸이 쑤실 정도로 습관을 들여놓아서, 다시 익숙해지는 것은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어차피 운동을 하든 말든 항상 피곤하기 때문이다. 운동을 하면서 매일 내 몸을 보게 되었고, 왜곡해서 날씬해 보이는 부분만 보는 게 아니라 직시하게 되었다. 내 몸이 생각보다 흉측하지 않구나. 세상에는 다양한 몸이 있다고 긍정*하게 된 것도 다 운동을 시작한 후의 일이다.

*긍정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함의 뜻으로 쓰였다.  


생각보다 운동은 꾸준함이 중요한 장르라서 조금만 게을러지거나 불규칙적으로 해버리면 몸에선 바로 반응이 온다. 가서 조금 일찍 끝내더라도 일단 길을 나서는 데 가장 큰 의의가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를 이끌어주고 체크해주는 사람이 사라진, 자기에게만 의존하는 삶을 매일 매일 신경쓰는 것은 고통 그 자체다. 그 고통에 익숙해지려면 더한 고통을 육체적으로 줘서 신체를 단련시키는 것이 먼저다. 정신력으로는 무언가를 할 수 없다던 어느 사람의 말에 온 몸을 다해 공감한다. 이 또한 수영을 하고 나서 느낀 점이다. 체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쉽게 타협하게 되고, 쉽게 싫증내게 되며,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쉽게 굴복하게 된다. 괴리가 너무 크지만 않다면 충분한 시간을 들여 매일 꾸준히 노력하면 다가설 수 있는데, 그 과정엔 에너지가 수반되기 마련이므로 에너지가 없는 사람들은 그냥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또 에너지를 매일 일정하게 정해진 양만큼 쓰는 것은 지구력이 필요하다. 폭발적으로 발산하고 기력을 잃는 것은 인생이라는 사이클에 적합하지 못한 방식이다. 지구력을 기르려면 어떤 형태로든 몸을 먼저 움직여야 한다. 처음엔 잡생각이 떠오르고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냐는 의문이 머리에 계속 떠오를 것이다. 그 의문에 굴복하면 안된다. 생각은 생각일 뿐이다. 지금까지의 삶과는 다른 방식에 뇌는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구애받지 않고 어느 정도는 뚝심있게 지속하는 고집이 필요하다.


그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기초 체력이 길러지게 되고, 기초 체력은 평소에는 엄두도 못 냈던 것들을 가뿐하게 해결해줄 것이다. 또한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 건강한 식생활은 하나다. 새벽에 운동을 가기 위해선 일찍 자야 하고 야식을 먹으면 안된다. 새벽에 일어나서 운동하면 하루가 길어지고, 낮에 일하고 밤에 잘 수 밖에 없다. 운동이 건강한 삶의 핵심 습관이라고 불리는 이유 중에 하나다. 지나치게 설명적이고 교과서적인 글을 적고 있는 기분이 들지만, 이런 내용을 내가 내 손으로 적게 될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삶이 시궁창이라고 느낀 적이 정말 많았다. 왜 이유없이 사람들이 죽게 되는지 감히 이해할 수 있다고 느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피해의식에 싸여 나를 세상으로부터 꽁꽁 숨겼다. 바닥에 닿자 비로소 바닥에서의 추진력으로 조금 일어날 수 있게 된 것 같다. 지금의 나는 이런 과거가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굳이 밝히지 않고 뻔뻔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이 시간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떠올리기도 힘들었던 과거의 내 모습들을 무던하게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에 더 나아가 살짝은 뻔뻔해지자고 다짐한 것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내 자신을 긍정한다고 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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