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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Feb 28. 2024

아빠의 아빠는 누구?

who is father's father

딸아이가 영어를 잘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는데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았는지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영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영어 단어를 꽤나 많이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배우지도 않고 일주일에 한 번씩 구몬학습지 선생님이 와서 가르쳐 주는 것이 전부인데 그 정도 실력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혹시 ‘영어에 재능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마음 한구석으로 밀려들어왔다. 당장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영어학원에 보냈다. 학원에 다니면서 영어를 더 재밌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딸의 장래희망은 외교관이 되는 것이었다. 세계 많은 나라에 관심도 많아 거실 한쪽벽에 나라명과 그곳의 수도, 국기가 그려진 학습자료를 붙여놓고 나와 누가 더 많이 외우나 경쟁도 했는데 언제부턴가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외우고 있었다. 세계 지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지구본을 사달라고 했다. 지구본 안에 불이 켜져 밤에 잠자리에 누워서도 볼 수 있는 꽤나 비싼 것을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사줬다. 딸이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인 외교관이 되고 싶다는 것 보다도 어릴 때부터 꿈과 목표를 갖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기뻤다.

교육청 영어체험마을이라는 곳에서 초등학교 4학년을 대상으로 영어골든벨 대회를 한다고 했고 딸아이가 학교의 추천을 받아 참여하게 됐다. 영어골든벨 대회에 나간다는 설렘과 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에 딸아이는 마음이 들떠 있었다. 나에게 대회에 꼭 와달라 했고 나 또한 들떠서 꼭 가겠다고 했다


대회날 영어체험마을에 갔다. 대회장에는 약 40여 명의 아이들이 화이트보드를 하나씩 들고 앉아 있었다. 아이들 표정에서 긴장감은 볼 수 없었고 그 나이에 맞는 천진난만함이 교실 가득 메우고 있었으며 가운데 정도에 딸아이가 앉아 있었다.     

영어 골든벨이 시작됐다. 영어 원어민 선생님이 어떤 단어를 설명하면 정답을 영어로 화이트보드에 쓰는 형식이었다. 서울을 ‘대한민국의 수도이며 가장 큰 도시는 어디인지?’라고 설명하였고 학교를 ‘매일 공부하러 가는 곳은 어디인지?’라고 설명하는 등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 문제들이 이어졌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정답을 적어나갔고 간혹 한 두 명이 탈락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 4번째 문제였던 것 같다. who is father’s father?라는 문제가 원어민 선생님의 입에서 나왔다. 문제가 좀 시시하다고 느끼고 있을때 아이들의 화이트보드가 머리 위로 올려졌고 그곳에는 대부분  'grandfather'가 적혀 있었다. 당연히 딸아이도 같은 답이 올라올 줄 알았는데 웬걸 틀린 답일 뿐 아니라 심지어 영어가 아닌 한글이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때 나와 딸아이가 눈이 마주쳤다. 정답을 확신하는 듯 너무 의기양양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또 한 번 웃었다. 그러나 이번 웃음은 아이의 대견함에 대한 기쁨의 웃음이었다. 아이가 쓴 정답은 한글로 내 이름이었다. 아빠의 이름을 당당히 쓰고 흐뭇해하고 웃음을 보이던 딸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대회가 끝나고 왜 그 문제를 틀렸냐고 물어봤다. 그리고 혹시 틀리더라고 영어로 써야 하는데 왜 한글로 썼냐고 물어봤다. 아이는 father라는 말이 들리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아빠의 이름을 썼다고 했다. 그러면서 골든벨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한 것을 전혀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빠 이름을 한글로 적은 것에 대해 기분이 좋아 보였고 재밌어했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딸아이가 father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나를 떠올리고 내 이름을 생각했다는 것이 너무 고마웠다     


나도 '딸', 'daugther' 이런 단어를 보거나 들으면 순간적으로 딸의 얼굴과 이름이 떠오른다. 심지어 딸이 초등학교 때 그려서 지금까지 거실 중앙에 액자로 걸어놓은 그림, 밤마다 보며 꿈을 키웠을 지구본, 내가 매일 읽는 성경책 중간중간 꽂아둔 딸의 어린 시절 사진 그리고 집안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는 딸의 소중한 흔적들이 나를 행복하게 하고 삶에 감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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