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좋아하는 몇 가지에만 아주 오랫동안깊게 관심을가지는 편이다. 얼마나 오랫동안이냐면, 하도 많이 읽고/보고/들어서 완전히 질릴 때까지. 나 자신을 대상으로 이런 표현을 쓰고 싶지 않지만, 솔직히 어느 정도 '오덕후' 기질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취향에 딱 맞는 공연은 무려 20번을 봤지만(심지어 아직 질리지도 않았다)취향에맞지 않으면 인터미션 때그냥 공연장을 나온다. 한 구절 한 구절이 마음에 와닿는 책은 읽고 또 읽어도 지겹지 않지만 처음 몇 구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책을 덮고 다시는 펼치지 않는다. 마음에 쏙 든 영화는 생각날 때마다 다시 보지만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영화는 결말을 본 적이 드물다.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가족과 친구들, 업무상 자주 소통하는 사람들, 이런저런 이유로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내 바운더리 내에서 나름대로 평온하고 행복하게 지냈다. 가끔은 새로운 사람을 사귀고 싶기도 했지만 굳이 노력을 하지는 않았다. 핑계는 많았다. 새로운 사람을 사귀었는데 이상한 종교를 믿는 사람이거나 다단계 영업 사원이면 어떡해? 나랑 안 맞는 사람일 수도 있는데 굳이 새로운 사람을 사귈 필요가 있을까? 일하고 강아지와 산책을 나가고 고양이들이랑 놀아주는 데 쓰는 에너지도 많은데사람 사귀는 데에도 에너지를 써야 해?
아마 나는 내 안정적인 삶에 내가 예측할 수 없고 쉽게 통제할 수도 없는 변화가 생기는 게 싫었던 것 같다.
우리 동네 당근마켓의 동네생활에는 각종 모임글이 활발하게 올라오는 편인데, 가끔은 참여해보고 싶은 모임이 눈에 띄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과 함께 하는 등산이나 오일 파스텔로 그림 그리기, 강아지 산책 모임이 특히 재밌어 보였지만 상술한 핑계 때문에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참고로 강아지 산책 모임에 참여하지 않은건 내 강아지가 주인을 똑 닮아서 다른 강아지를 별로 안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우주는 좁고 깊었다.
그런데 클라이밍을 시작한 후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낯선 장소에 가서 낯선 경험을 하면서 나의 우주에 많은 변화가 생기는 걸 느낀다.
나는 요즘 1대1 클라이밍 강습을 받으려고 살면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동네에 간다. 연습을 위해 새로운 클라이밍장을 찾아보고 방문한다. 혼자 아무리 시도해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으면 모르는 사람에게 기꺼이 도움을 청한다. 모르는 사람이 어려운 문제를 멋지게 풀면뒤에서 열렬히 박수를 친다(다른 분들은 "나이스!"라고 외쳐주시던데 다음에는 나도 "나이스!!"라고 해봐야지!). 조금 더 실력을 늘린 후 클라이밍 크루에 가입하려고 한다. 아니, 어쩌면 직접 크루를 만들지도 모르겠다!
클라이밍을 시작한 게 이런 나비 효과를 가져올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최근에 생긴 모든 변화가나는참 좋다. 클라이밍장에서 마주치는 열정 가득한 사람들이 좋고, 굳은살이 생기기 시작한 내 손이 좋다. 처음으로 산 클라이밍화와 초크백이 마음에 쏙 든다. 강습을 받고 온 날에는 일을 하면서도 배운 내용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틈틈이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서 클라이밍 영상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근사하게 다이노*도 하고 아주 어려운 문제도 척척 풀 수 있을 거라는 꿈에 부풀기도 한다.
*다이노: 다이내믹 무브먼트(Dynamic movement)의 줄임말로, 두 손과 두 발을 모두 떼고 점프해서 멀리 있는 홀드를 잡는 기술(출처: 클라임투어 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