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땐 12월 31일 저녁부터 새해가 온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설렜다. 친구들끼리 문자를 주고받았으며 부모님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기도 했고, 조금 더 자라서는 친구들과 함께 해가 바뀌는 시간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TV에서는 새해가 바뀌기 전부터 작은 사이즈의 디지털시계를 자막 사이즈로 띄워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켰고 프로그램 진행자는 해가 바뀌는 시점 즈음 목소리 톤을 두 단계나 올려 10초 전부터는 카운트다운을 우렁찬 목소리로 뽑아냈다. 그리고 틱. 1월 1일 0시 0분 0초가 되는 순간 축포가 터지고 사람들이 환호했다.
이제는 내가 조금 나이가 들어 그런 분위기를 감지 못하는지 아니면 그러한 행사나 분위기가 수그러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언젠가부터는 연말이라도 평소 습관대로 일찍 잠자리에 들고 해가 바뀌고 평소 습관대로 일찍 눈을 뜬다. 직장에서 통계자료를 입력할 때 혹은 기록물을 남기는 경우 날짜란을 기입하다가 습관적으로 손이 가는 연도 숫자 네 개를 누르다가도 아차차 싶어 다시 지우고 끝자리를 수정하는 것. 이것 말고는 새해가 왔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다가 한 달 전쯤 새해 첫 달 당직 일정이 나왔을 때 나를 포함한 1월 1일 당직자 세 사람은 '당직 마치고 가까운 아차산 한번 갈까요?'라며 의견을 모았다. 처음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땐 막연한 앞날에 대한 내용이라 오케이 그러자요라고 답했다. 그리고 나는 신나는 마음에 직원들에게 바람을 넣어 두 명의 원정대를 더 영입했다. 시간이 지나 막상 1월 1일이 가까워지니 눈은 안 올까 날씨가 춥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마침 2026년 1월 1일에는 아침 온도 영하 11도의 매서운 추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매년 1월 1일 아침 이불에서 느지막이 기어 나와 TV를 보며 먹는 떡국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전부터 선생님들 사이에서 '영하 11도래요... 당직 끝나고 그냥 밥이나 먹을까요?'라는 온건파의 간지러운 여론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우스개 소리로 얘기하자면 그 다섯을 대충 버무리면 테토기질과 에겐 기질이 대략 6:4 정도 되는 것 같다. 결론은 당직 끝나고 가면 낮이라 그리 춥진 않을 것이고, 또 산을 오르다 보면 추위도 가실 거니 호연지기의 마음으로 갑시다로 정해졌다. 그리고 우리는 오전 당직업무를 마치고 아차산으로 향했다.
그래도 평소 유산소운동과 무산소운동을 아주 깔짝깔짝 했왔던 덕인지 아차산 등정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사실 아차산이 많이 낮았다.) 이미 여러 번 와 보셨던 선생님 말씀으로는 정상이 정상 같지 않아 보인다고 하셨다. 실제로 그랬다. 이곳이 아차산의 정상이라며 이런저런 내용이 쓰여 있는 기념촬영 스폿은 단출해 보였다. 하지만 정상에서 서울을 바라보니 넓게 트이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 특히 내가 사는 동네는 한 없이 작아 보였다. 그 작은 공간에서 작년 한 해 부대끼며 살아왔구나 라는 생각이 드니 덧없다는 생각, 동시에 잘 살아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1월 1일 날 이렇게 알차게 보냈던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디어에서, 주변에서 새해라고 들뜨는 마음을 한껏 고양시키지만 추위를 피해 집에 누워있는 이상 나의 1월 1일은 그저 흘러가는 하루일 뿐이었다. 앞서 말했던 어린 시절에도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그 시점의 거대한 시간적 경계가 신기했을 뿐이지, 1월 1일로 안착하는 순간부터는 그저 집에서 쉬는 하루 정도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새해 등산은 나에게 뜻깊은 경험을 가져다주었다. 녹록지 않은 자연의 악조건을 뚫고 지하철 역명으로까지 사용되고 있는 거대한(?) 산을 등정했다. 내가 사는 곳을 돌아보았고 그때의 기분을 직장 동료들과 함께 나누었다. 별 말은 나누지 않았지만 우리는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다음이 기대되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