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F 남편 정신 차려 이 험난하고 각박한 세상 속에서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우리 예랑이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회사 동기의 청첩장 모임을 하던 중 결혼을 코앞에 둔 예비 신부의 한마디에 갑자기 분위기 백 분 토론이다.
정말이지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진영이 완벽하게 갈릴 수가 있다니, 남녀 관계없이 순식간에 8명이 4:4로 진영이 갈렸다.
'아니 요리할 때 식재료를 덩그러니 놔두고 바로 옆에서 그렇게 물을 콸콸 틀면 이게 다 식재료에 튀니까 이걸 치우고 물을 쓰라고 몇 번을 얘기했는데 이번에도 그냥 쓰더라고.. 그래서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냐고 물어봤더니 기분 안 좋은 티 팍팍 내고..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어 왜 그러는 거야 정말'
누가 보면 쟤들 왜 저러나 싶었겠지만 우리는 T와 F무리로 정확하게 나눠졌다.
다들 오늘 같은 날만 기다렸다는 듯 청담동 럭셔리한 오뎅바에서 꼬치 하나씩 들고 양측 진영을 설득하기 위한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다.
'내 남자친구도 꼭 그런 거 하나씩 있더라. 굳이 왜 그렇게 하는지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데 항상 그러면 짜증 내더라고'
vs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 아니고, 짜증 내는 거잖아. 어디 한번 받아쳐봐 딱 이건대 그렇게 얘기하면 누가 기분 좋게 얘기하냐?'
1시간 가까운 치열한 공방 끝에 '그래도 난 우리 남편 사랑해'로 훈훈하게 끝났지만 신기했다.
F인 나와 T인 와이프 사이에 종종 투닥거리는 일들의 대부분도 이런 대화의 흐름으로 이어지는데 도대체 왜 그럴까?
T의 솔직함은 F에겐 상처로,
F의 무던함은 T에게 답답함이 되기도 한다.
MBTI를 100% 맹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저 인간은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에 그쳤던 지난 과거와 달리 MBTI를 통해 '아 저 사람은 T니까, J니까 그런가 보다'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됐다.
특히 F(감정) vs T(사고)의 차이는 'T발 너 씨야?'라는 유행어를 만들었을 만큼 극명한 입장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일화를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자.
T의 의식의 흐름
- 같은 말을 이전에도 몇 번 했었는데 왜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지 의아하고 답답하다.
- 분명 저렇게 하면 좋을게 하나도 없는데 도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된다.
- 잘못된 부분은 바로잡고 싶고 고쳐줬으면 좋겠다.
F의 의식의 흐름
- 굳이 열심히 설거지하고 있는데 꼭 저런 식으로 얘기를 해야만 하나? 기분이 상한다.
- 조금 튈 수도 있지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인가?
- 나도 내 나름대로 고치려고 하고 있는 건데 항상 마음에 안 들어하는 것 같아서 서운하다.
T는 그 상황만 놓고 판단한다. 오늘 기분이 좋았건 방금까지 분위기가 좋았건 관계없이 지금 벌어진 이 상황이 이해가 잘 되지 않으면 바로 잡고 싶다.
T와이프: (답답한 마음을 감추려 노력하며)
'오빠 그거 맞아?'
F는 그 질문을 듣자마자 서운하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나?' 이전에 금방까지 우리 되게 기분 좋게 잘 얘기하고 좋았는데 이 사소한 거로 굳이 이렇게 트집 잡아야 하나? 싶다.
F남편: (짜증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뭐 때문에 그러는데?
T와이프 입장
이해가 안 된다. 이전에 얘기했던 문제고 비효율적인 일이 또다시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납득이 안된다. 혹시 모를 사정이 있을 수 있을까 싶어 묻는다.
T와이프: 왜 이렇게 해?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어?
무조건 내가 맞으니 그걸 따르라는 얘기가 아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설명을 해주길 바란다.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이번 기회에 바꾸면 되니까.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는 방향이 맞다면 나의 의견을 따라주면 좋겠다.
F남편 입장
이게 그렇게까지 화날 일인가 싶다. 입장 바꿔 똑같은 일이 반대로 벌어진다 해도 F남편은 상관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F남편의 시선에서 T와이프의 물음은 의도와 다르게 차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F남편의 시선: ‘당최 이해가 안 되는데 왜 그러는 거야? 어디 한번 얘기해 봐’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T와이프의 답답함과 짜증이 섞인 듯한 말투가 서운한 F남편.
똑같은 일로 싸우는 것 같이 보이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서로가 서운함을 느끼는 포인트가 미묘하게 다르다.
T가 원하는 대로 했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해프닝임과 동시에 조금만 다르게 표현했더라면 아무렇지 않게 끝날 수도 있었을 일이기도 하다. 이렇듯 누가 잘했고 잘못했고 따지기 이전에 서로의 성향과 생각의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 부부는 항상 주제만 다를 뿐 싸우는 패턴이 똑같았다.
패턴: (F남편) 특정 행동 → (T와이프) 이니쉬 → (F남편) 서운함→ (T와이프) 답답함 → (All) 냉전
그래서 매번 화해하는 패턴도 비슷한 게 장점(?)이기도 하다.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나만의 화난 와이프 비상 대응 매뉴얼은 다음과 같다.
서로가 화나있는 포인트가 다른 상태이기 때문에 분명 둘은 의견 차이가 날 수밖에 없고 이해가 안 된다. 다만 경험상 10번 중 8번은 T와이프의 주장이 이성적으로는 옳은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속에서 끓어오르겠지만 와이프가 하는 얘기가 틀리진 않았다면 대화의 시작은 사과로 시작하자.
T와이프가 쥐고 있는 패를 빠르게 인정하고 사과해 버림으로써 무력화하는 전략이다.
T 와이프:
오빠, 싱크대에서 물 쓸 때 이렇게 쓰면 물 튀잖아, 지난번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왜 이러는 거야?
F 남편:
왜 또 잔소리야.. 이게 그렇게까지 뭐 튀는 거 그렇게 중요해?
아, 저번에도 얘기했던 것 같은데 미안.
막상 T와이프의 말이 맞긴 한 것 같아서 사과는 했지만 서운함이 남아있다.
T와이프는 ‘이상한 걸 이상하다 한 건데 이게 왜 화날 일이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의 입이 왜 뾰로통 튀어나왔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의 솔직한 감정상태(어떤 부분이 섭섭한지) 자세히 말해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몰라줘서 서운하다' 라던지 '그렇게까지 짜증을 낼만한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라던지 우리의 속에 끓어오르는 말들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가 어떤 부분 때문에 감정이 상한지 알 수 있게 된다.
F 남편:
왜 또 잔소리야.. 이게 그렇게까지 뭐 튀는 거 그렇게 중요해?
아, 저번에도 얘기했던 것 같은데 미안.
짜증 나고 답답한 건 알지만 나도 나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그렇게 표정에 짜증을 다 드러내면서 얘기하는 부분이 좀 서운해.
F들의 특성상 이 어색한 침묵의 냉전상태를 오래 유지하는 걸 힘들어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얼른 화해를 해버리고 끝내버리고 싶지만 사실 쉽지 않다. T들도 생각을 정리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곰곰이 고민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섣부른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보다는 서로가 입장을 바꿔 충분히 고민해 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을 가지는 것이 나에게는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F 남편:
왜 또 잔소리야.. 이게 그렇게까지 뭐 튀는 거 그렇게 중요해?
아, 저번에도 얘기했던 것 같은데 미안.
짜증 나고 답답한 건 알지만 나도 나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그렇게 표정에 짜증을 다 드러내면서 얘기하는 부분이 좀 서운해.
그래도 지난번에도 조심해 달라고 했던 부분인데 신경 못써서 미안해. 다음부터 조금 더 신경 쓸게.
분위기가 서먹한 당시에는 괜히 찝찝하고 마음도 불편하지만 나의 경험상 그 다음날 자고 일어나면 대부분 자연스럽게 앞으로 '내가 더 잘할게~' 얘기하며 마무리됐었다. 다른 커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다툼과 화해의 패턴은 대부분 이런 흐름으로 이어져 왔었다.
이 글을 읽은 독자님들의 반응이 특히나 더 궁금하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에 좀 더 가까운 느낌이 들기도 하고 사람의 관계를 ‘넌 T니까, F라서!’ 등으로 정의할 수는 없기에 서로 다른 환경 속에 어느 정도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 글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사람 사이의 관계의 첫 시작은 생각보다 서로가 이렇게 다를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유가 MBTI가 됐건 자라온 가정환경이 됐거나 간에 똑같은 일을 놓고도 서로가 받아들이는 입장과 감정이 모두 같을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에 아무리 오래 연애를 했어도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기 전에는 모두 알지 못한다는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야만 비로소 ‘내가 맞고 당신이 틀렸다. 혹은 그 사람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라고 결론짓기 이전에 서로가 왜 이렇게 다른지, 어떤 점이 다른지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할 수 있게 되며 이러한 과정이 관계를 단단하게 하고 서로가 성숙해지는 거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간 지나면 뭐 때문에 싸웠는지 조차 기억도 나지 않을 에피소드에 누군가는 가슴에 못을 박기도, 누군가는 당신 아니면 안 된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지 않는가.
연애, 결혼생활 모두 단판 승부로 우승자를 가리는 게임이 아니라 갖은 풍파를 이겨내야 하는 마라톤과 같음을 명심하자는 다짐을 스스로 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F남편들이여.. 부디 살아남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