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우리 지역의 각 매니저들이 참석하는데 인원이 많아 백화점/로드샵 나눠서 2부로 진행한다. 매출비교분석과, 제품 관련 건의사항을 나누고 전달사항도 전달한다. 그렇게 매월 하는 회의였다.
1부 백화점 매니저들이 다 모이면 20명 정도가 된다. 각 영업담당들과, 차장, 지점장 모두 참석하여 매출분석을 한다. 그렇게 높은 분들이 퇴장하시면 내 차례가 된다. 운영 관련 세부 내용의 회의는 내가 진행한다.원래는 2부만을 맡아왔는데, 같은 보직의 선배가 육아휴직에 들어가면서 혼자 하게 되었다.
유독 1부가 긴장되었다. 내가 입사할 때부터 있던 선배들로 구성된 1부 그룹.
나는 내가 '긴장된다'라는 사실을 빨리 느꼈던 것 같다. 다음날 회의를 생각하며 퇴근하는 길. 청심환을 사들고서 요놈에게 의지해보자 했다.
1부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내가 입사할 때부터 매니저로 있던 오래된 선배들로 이루어졌다. 근교 지만 타지에서까지 들어와 예정된 시간보다 다들 빨리 도착했다. 친한 매장들과의 대화소리와 사이가 좋지 않은 매장들의 견제가 뒤섞여서 심란하다. 2부는 내가 입사하고 나서 새로 들어온 직원들이 많은 그룹이었다. 그들에게는 입사 때부터 내가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각인이 되어있다. 아무래도 그 차이인 것 같다. 1부 그룹은 왠지 모르게 불편하고, 2부 그룹은 편했다.
지난번 회의 때를 떠올려보면 문제긴 문제였다.
시선에 주눅이 들어 하도 머리가 하얘지길래 이번에는 거의 대본식으로 멘트를 뽑아갔다.
웬걸 그런데 이번엔 과호흡이 온다. 이 사람들도 분명 안다. 내가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런 상태는 약 5분간 지속되었다. 짧다면 짧지만 그 순간은 시간이 멈춘 것 같다. 나에게 사진처럼 박힌 장면이다.그리고 매니저들의 질문을 시작으로 대화하기 시작하며 조금씩 긴장이 풀린다. 회의 내용에 몰입이 되면 점점 자연스러워진다.
1부 그룹은 다들 경력이 오래되고 어쩌면 나보다 더 많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 나를 평가할 것 만 같은 기분에 압도되었다. 괜한 걱정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그룹끼리도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보니 더욱 냉랭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1시간 가량 1부 회의가 끝나고 한바탕 우왕좌왕 하고나면 다시 2부 가 시작된다. 2부는 시작부터 시끌 시끌하다. 연령대 분포가 넓은 그룹이다. 20대 초반부터 50대까지 구성되어 있고 이 사람들은 대부분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자연스러운 스몰토크 들을 곁들여 원활하게 진행이 되었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그렇게 차갑던 1부 매니저들과도 점점 가까워지면서 초반의 불편한 느낌들이 사라졌다. 긴장하던 내 모습도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본사와의 교류를 나를 통해 하고 있는 지금은 확실히 내가 도움을 주는 포지션이다. 상황과 입장이 달라지면서 전체적으로 나아진듯하다. 어쩌면 내가 조금씩 안정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이 필요한 정보를 주고 도움을 주고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왔다.
막연하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감의 차이.
죽어라 연습하고 반복한 일을 할 때의 사람과, 전혀 준비되지 않은 일을 하려는 사람은 대번 다르다.
그땐 내가 1부 그룹의 사람들보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스스로의 의심이 있었다.
지금은 자신이 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다. '저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압박감이 들었다.' 이런 감정들도 자신감의 문제다.
'나를 싫어하는 듯한 사람들 앞에서 부족한 내 모습이 초라해져 압박이 되었다.'라는 말이 정확하다.
업무를 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준비가 되어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할 때도 정당한 자신감이 있다. 그들이 나에게 하는 부탁은 같은 회사에 속해있으므로 당연히 누구라도 해야 할 일을 같이 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반면 쭈뼛쭈뼛 자신감 없는 사람이 하는 부탁은 정말 그 사람의 업무를 대신해준다는 느낌이 든다.
이건 약간 처한 입장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말한 것과 반대로 자신감 있게 부탁하는 동료를 재수 없거나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고, 어렵게 부탁하는 동료에게 선뜻 도움을 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내가 말하는 '자신감'이라는 단어는 잘난 체나 우월감이 아니다. 준비한 만큼 갖춰지고 단단해지는 '확신'이다.
여러 사람이 모여있는 곳에서는 같은 일이라도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러쿵저러쿵 사람들의 평가와 이야기가 두렵다면 맡은 일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러면 '자신감'과 '확신'이 따르게 되는데 이것이 충족되면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생각들이 상관없어진다.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뭐든 할 수 있는 자신감이 들지 않을까 생각할 때도 있었다.
사실은 그 반대였다. 자신감이 있어야 스스로 옥죄지 않고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그렇게 노력의 시간이 쌓여가다 보니 나도 자신감이 생기고 마음여유도 생겼다. 그러다가 일이 많아지고 힘들 때면 또 잠시 놓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하나 줍는다. 그게 내 방식이다.
정리정돈과 같다. 정리의 기본은 일단 수납장 속에 물건을 다 빼내버려야 한다. 그리고 하나하나 분리하며 정리해야 한다. 정리하기 전 바닥에 내려놓는 건지 확 던져버리는 건지 모를 그 감정이 담긴 버려놓는 잠깐의 시간은 묘한 쾌감까지 준다.
하나 하나 주워담으며 여유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진짜 감당 못할 상황이 와도 이제는 당황하지 않는다. 혼자서 못할 일은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 적어도 회사에서 일은 혼자서는 절대 하지 못한다. 다 같이 해야 잘하는 거다. 자신감이 들어있는 태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오늘도 내일도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오늘도 나는 이렇게 내공을 쌓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