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어느 초등학교 교실 안.
1-3반 교실에는 담임선생님과 반 아이 한 명만이 각자의 자리에 앉아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은 4교시만 마치고 하교한다. 째깍째깍 시계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이는 책상에 앉아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약간 책을 읽는 시늉을 하다가 이내 지루한지 벌떡 일어났다.
창가에 팔을 걸치고 매달려 발을 동동 구르며 밖을 구경했다. 바람도 불고 날씨도 맑다.
운동장에는 뛰어노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저 꿈뻑꿈뻑 바라보는데 오른 커튼 사이로 무언가 보였다.
'엇! 찾았다! '
아이는 창가구석 커튼 사이에 숨어있던 실내화 가방을 높이 들고 외쳤다.
"선생님! 찾았어요!"
수첩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던 담임선생님은 하던 일을 멈추고, 아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약간은 장난스럽게 눈을 한번 찌푸렸다.
그리고 아이에게 말했다.
"가방이 거기 있었구나? 친구들이 장난을 쳤나 보다, "
없어졌던 실내화 가방을 찾은 것이다. 책상 옆 고리에 걸어두었던 실내화 가방이 없어져서 집에 가지 못하고 있었다. 실내화가방에는 집 열쇠가 들어있었다. 열쇠에 기다란 끈을 매듭지어 가방 손잡이에 꼭 묶어 다녔다. 아이 엄마의 방식이었다.
없어진 가방, 딱히 교실에 앉아있는다 해도 마땅한 방법은 없었지만, 아마도 담임은 아이 엄마에게 전화를 해봤지만 일하는 중인 아이의 엄마는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고 있었을까?
"선생님, 저 이제 가볼게요"
"그래, 조심히 가렴"
교실문을 나와 복도를 걸으며 생각해 보니 집에 가기가 싫었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언니가 생각났다. 언니는 5학년 6반이었다. 고학년인 언니는 오후 수업을 하니까,
오후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집에 가면 좋겠다고 생갔했다.
1학년 아이가 5학년 교실로 향하는 길은 모험 그 자체이다. 설렘으로 시작한 기분은 약간은 두렵기도 하지만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반겨주는 언니의 모습을 상상하며 드디어 5학년 6반 앞에 도착했다.
수업시간일까? 교실의 뒷문이 닫혀있었고 앞문만이 살짝 열려있었다.
앞 문의 복도 앞에 아이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나무 신발장이 있는 그 복도 자리는 이제 아이의 방이 되었다.
신발을 벗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언니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심심하지 않도록 숙제라도 할 생각이었다. 책을 펴고 연필도 꺼냈다. 책을 반쪽쯤 읽었을 때 살짝 열려있던 앞문이 마저 드르륵 열렸다.
눈썹이 진한 중년의 남자 선생님이 의아한 표정으로 아이에게 물었다.
" 너 누구니? "
아이는 순간 생각했다.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뭐라고 하시려고 그러나?
당당하게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니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 누구 동생이야? "
대답하려는 순간 교실 안쪽에서 대신 대답이 들려왔다.
"선생님 얘 동생이에요~!! "
문틈 사이로 잠시 언니 얼굴이 보인다.
선생님은 아이와 언니를 번갈아 쳐다보며 교실문을 닫으려다, 잠시 아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교실 문을 활딱 여시며 말했다.
"야~~ 이것 좀 봐라, 초등학교 1학년도 자기 스스로 숙제하고 딱 앉아서 공부하는데 너희들이 보고 배워라, 1학년이 훨씬 낫잖냐. "
교실 안의 언니오빠들이 문사이로 다 아이를 쳐다보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끝난다, "
선생님은 연신 감탄하시다가 문을 닫았다.
아이는 잠시 텅 빈 복도에서 생각했다.
'내가 좀 이상한 행동을 한 건가?' 그리고 다시 하던 숙제를 계속했다.
얼마 후 종소리가 울리고 선생님들과 언니오빠들이 우르르 나왔다.
아이는 언니를 찾아 요리조리 고개를 돌리며 교실 안을 살폈다.
언니가 친구들 사이에 묻혀 나왔다.
"언니! 집에 같이 가려고 기다렸어! 열쇠가 없어졌었는데 다시 찾았어! "
언니의 표정과 눈은 바빴다. 친구집에 가기로 해서 같이 집에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럼 학원은? 피아노 학원도 가야 하잖아!"
"어 친구집에 갔다가 갈 거야! 너 집에 가서 좀 놀다가 학원 가면 돼!"
"나 집에서 놀게 없어. 엄마가 학원은 같이 가라고 그랬는데?"
"집에서 비디오 보면 되지! "
"비디오 틀 줄 몰라!"
"비디오 보는 거 알려줄게! 잠깐만!"
언니는 가방에서 공책과 연필을 꺼냈다.
비디오를 넣고 어떤 버튼을 누르면 나오는지 그림을 동원해 열심히 순서를 적고 있었다.
아이는 열심히 설명이 적힌 종이를 한참 바라보았다. 어차피 혼자 비디오를 볼 생각은 없었다.
"알았어 있다가 학원에서 만나! "
그렇게 집으로 향했다. 저금통에서 200원을 꺼냈다.
집 앞 문방구로 가 간식거리를 샀다. 다른 것은 기억이 안나지만 옥수수가루가 들어간 고소한 가루를 플라스틱 미니 숟가락으로 퍼먹는 것이 있었는데 50원인지, 100원짜리 문구점 간식이었다.
집에 와서 책상의자에 앉아 몇 숟가락 떠먹었다. 그리고 절반 정도가 남았다. 남은 부분이 습해지지 않도록 끝에서부터 돌돌 말아 야무지게 접어서 노란 고무줄로 튕겨놓았다. 그리고 서랍에 색종이 하나를 꺼내 사인펜으로 편지 하나를 적었다.
<언니에게>
언니 이 가루 맛있어. 언니 생각나서 반 남겨 놓았어. 언니 먹어.
나는 먼저 학원에 갈게. 있다가 학원에서 만나 그럼 안녕.
남은 가루 간식과 색종이를 나란히 언니 책상옆에 두고 집을 나섰다.
겁은 많지만 그래도 아이는 야심 차게 움직였다.
그날은 학원에서 조차 언니와 엇갈려서 만나지 못했다.
다음날 아이 엄마가 물었다.
"어제 언니랑 학원같이 안갔어?"
그리고 그날이 아닌 다른날 엄마가 누구와 통화를 하는 걸 들었다.
"ㅇㅇ이가 집에 혼자있는걸 무서워해서,,, ㅇㅇ이한테 같이 데리고 집에오고 학원가고 하래도 지 친구들이랑 다니느라고,, 그렇지 뭐,, "
엄마는 전화를 끊고 아이에게 말했다.
"ㅇㅇ아 집에 있을때 장롱에서 귀신이 나올것 같아서 무서웠어? "
아이는 잠시 생각했다. 내가 언제 그런이야기를 했더라...
"응! 무서웠는데 아니야 괜찮아!"
"선생님이 그러던데 집에서 귀신이 나올것같아서 혼자있기 무섭다구 그랬다구~ 괜찮아 언니랑 같이다니구 학원갔다오구 그러면 엄마 금방오잖아"
선생님과 같이 있던 시간에 아이가하는 스쳐가는 이야기를 선생님이 캐치했다.
겁이 많은 아이. 선생님은 그날 오후시간 창가를 바라보는 아이를 보며 무슨생각을 했을까.
아이는 정말 귀신이 무서웠을까?
아무것도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안했기에 형체가 없는 무언가를 설명할 길이 없어
귀신이라고 대상을 찾아 선택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날 이후 엄마는 다시 한번 언니에게 학원 갈 때 꼭 같이 데리고 다니라고 나무랐다.
그렇게 26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기억과 느낌들이 살아나는 순간이 있다.
그날의 장면, 스쳐간 기분, 물건, 시선, 맛, 향기 무엇 한 가지만으로도 내 안에서는 지금껏 경험한 비슷한 온갖 기억들을 꺼내 알려준다. 이미 비슷한 무언가를 경험했다고.
그러니 지혜가 쌓인 지금의 내가 그날의 아이를 만난다면,, 두려워하는 아이를 안아주고 사랑해 주고, 안심시켜 주고, 씩씩하고 행복하게 웃는 모습으로 바꿔 더 이상 그 공간에서 쓸쓸하게 머물지 않게해주자.
이제 그 아이는 내마음에 제일 환하고 예쁜곳에서 사랑으로 가득찬 눈빛으로 운동장을 바라보고있을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