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환갑이라면 동네잔치를 크게 했던 그 시절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동네가 시끌벅적하게 환갑잔치를 크게 했었던 나이를 훌쩍 지나 칠순을 넘기셨었다. 앞으로는 평온하게 남은 여생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최고의 낙인 분들에게 나는 걱정 보따리를 안겨 드렸다.
내가 외갓집에서 다리를 다치고, 누구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내게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미안한 듯 우리 삼남매에게 더 애정을 쏟으셨다.
우리 삼남매 모두가 아기티를 벗을 때까지 매번 티도 안 나지만 모이면 꽤 큰돈이 되었을 비싼 분유 값을 대 주셨고, 하루에도 수 벌씩 나오는 아가들의 빨래가 감당할 수 없을 때에는 세탁기도 사 주셨다. 우리가 자라면서 때때로 필요한 우리 집의 온갖 살림을 키워주셨던 분은 꼭외할아버지셨다.국민학교만 겨우 졸업시키고 아직 어린이의 얼굴을 한 채로 객지에 나가 돈을 벌기 시작했던, 단출한 살림으로 가정을 꾸리며 고달프게 살아가는 아들들에게는 용돈을 받으시면서, 그 돈을 한 푼 두 푼 모아 하나뿐인 막내딸의 가족에게 쉽게 주머니를 여셨다.
하루는 외할아버지가 쓰러지시고 누워서 끙끙 앓으셨다. 아직 그나마 의식이 있으셨을 때 나는 말씀드렸다.
"할배! 꾀병 부리지 말고 일어나라!"
이미 저번에도 한 번 쓰러지셨다 일어나시기도 했고, 내가 아는 모든 어른들 중 제일의 장난꾸러기 할아버지께서 엄살 부리시는 것이라 생각했다. 여름에도 보일러난방을 켜셨던약골할아버지셨으니 말이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가족들이 다 있는 가운데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니 때문에 가슴이 아파서 못 죽겠다"
라며 힘없는 손을 겨우 들어 힘겹게 가슴을 치셨다.
12살이었어도 할아버지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갑자기 깨달아져 슬펐지만 순간적으로 더 씩씩한 척했다. 씩씩한 척이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때말씀드릴 걸 그랬다.
'할배! 내 걱정하지 마! 내 다리 아픈 거 아무렇지도 않다!'
라고 가는 길 편하게 가실 수 있게 안심시켜 드릴걸 그랬다. 되려 지금의 나는 가슴 저리게 그때를 후회하고 있다.
36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의 내가 아닌 가족들이 돼서 어른들의 시선으로다시 어린 나를 돌아보게 된다. 아니 그때의 가족 하나하나가 되어 본다.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손녀가 크게 다치게 되었고,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음에도 죄책감으로 남은 하루하루를 보냈을 할아버지, 할머니를 생각하니 죄책감은 어느 순간부터 내 몫이 된 것 같다.
미안하고 또 많이 미안한 우리 할배할매······.
그때도 죄스럽고, 오늘도 마음이 아프다.앞으로 떠 올릴 때마다또많은 눈물을 흘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