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가장 큰 읍에 소재한 병원으로 갔다. 어둑어둑해진 저녁 또는 밤이었던 것 같은데 외할머니는 아직도 병원이 떠나갈 듯 우는 손녀를 위해 주사를 좀 놔 달라고 사정을 했다. 아까 오자마자 주사를 두 대나 맞았는데 할머니의 부탁으로 나는 또 주사를 맞았다. 발가락 절단의 통증이 아프기도 하고 주사를 계속 맞는 것이 아프고 서럽고 억울해 또 울었다.
시골 읍의 병원에서는 할 수 있는 조치가 없어 그 길로 링거를 꽂고 택시를 타고 또 이동을 했다. 외할아버지는 택시 조수석에 타고 외할머니는 뒷좌석에 나랑 같이 탔는데 나는 외할머니를 계속 때리고 아프다고 계속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또 우니 외할아버지는 내게 울지 말라며 100원짜리 동전 몇 개를 손에 쥐어 주셨다. 평소 그리도 좋아하던 동전이었는데나는 그 돈도 필요 없다는 식으로 집어던지며 울어댔다.
지금보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더 시간이 많이 걸렸을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큰 도시인 부산의 한 병원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잠깐 자고 일어났는지 중간의 기억은 없는데잠깐 눈을 뜬 나는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아빠를 만났다.
"OO야! 내 다리랑 바꾸자, 아빠 다리랑 바꾸자. 흑.... 흑...."
아빠가 울었다. 내가 본 아빠의 첫 눈물이었다. 내 다리가 아프다는사실을 잠깐 잊고 그렇게나 무섭고 무섭던 아빠의 눈물을 신기한 눈으로 봤다. 우리 아빠가 울다니······. 그때는 아빠가 우는 것이 그저 놀라웠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는 고작 5살인둘째 딸의 오른쪽 발가락 모두를 절단해야 된다는 사실에 가슴이 무너졌을 것이다.
꼬물거리는 예쁜 내 새끼가 조금만 다쳐도덧나거나 흉이 질까 노심초사할 테며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 언제나 조바심이 날 텐데, 잠깐 아프다 아무는 그런 흔한 상처가 아니라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하게 될 발가락 모두 절단이라니······.
앞으로 이 어린것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 어떻게 내 어린 딸이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크면서 때때로 아이가 받아야 할 상처와, 장애를 가짐으로써 괴로움을 겪어내야 되는 것이 믿기지 않아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내 딸이 감당해야 될 아픔과 힘겨움을 차라리 본인이 짊어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아빠 다리와 바꾸자며 그렇게 서럽게 우신 간절함이었을 것이다.
두 밤만 자면 날 데리러 온다는 그날, 아빠는 엄마에게 나를 데리러 가라고 했었고, 엄마는 일요일 오후라 목욕을 하고 집안일을 좀 챙겨 놓고 날 데리고 오려고 했었다고 한다. 엄마는 동네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다 목욕탕으로걸려 온 엄마를 급하게 찾는 전화를 받았고, 언니와 함께 물을 뒤집어쓴 채로 옷을 갈아입고 급하게 나왔다고 한다. 아빠는 딸이 다쳤다는 소식만 듣고 읍으로 가서도 안 돼서 부산으로 간다는 연락을 받고 그 길로 부산으로 급하게 올라온 것이다.
어딜 어떻게 다쳤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정신없이 온 부산의 큰 병원이라는 곳의 의사에게 들을 수 있었던 말이 딸의 발가락 절단이었으며 수술동의서에 도저히 적기 힘든 본인 이름을 하염없이 울고 또 울면서 어렵게 한 글자 한 글자를 적었을 것이다.아빠가 지금까지 살면서 아마도 가장 쓰기 싫은 이름 세 글자였을 것이다.
수술 후의 나의 첫 기억은 병실에서 다리를 오므린 채로 깨어났는데 다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아파서 깨어나자마자 울었던 기억이다. 의사 선생님도, 간호사 이모도, 엄마도 모두 다리를 펴라는데 너무 아파서 도저히 펼 수 없었다. 발가락을 절단했는데 왜 다리를 펼 수 없었는지 모르겠다. 또 며칠을 계속 아파서 울었던 것 같다. 그 이후는 그냥 병실에서 지냈던 기억뿐인데수술 후 경과가 좋지 않아 수술한 부위가 괴사가 되었고, 어쩔 수 없이 나는 또 한 번 수술대 위에 올라 오른쪽 발목까지 절단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