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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서비스직이다

개발자의 직업관과 역할

by 동그리

"225/45R17 TA31 4짝... 아, 여기있다."

타이어가 잔뜩 쌓여있는 지하 창고. 타이어 고무냄새가 눅눅한 습기를 머금고 코를 찌른다.

일을 하다보니 입고 있는 옷에도 고무냄새가 배여있다.

나는 찾은 타이어를 어깨에 메고 택배 송장을 뒷주머니에 찔러넣고는 타이어로 이루어진 정글을 헤쳐나갔다.


어디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알 수 없다.

타이어 위에 타이어가 쌓여있는 기둥들 사이로 라벨을 뒤져보며 찾아다닐뿐이다.

예전에 찾으면서 봤던 감으로 200평 가까운 공간을 찾으러 돌아다녀야 했다.

공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싶어도 타이어가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럴수가 없다.

한달에도 몇번씩 타이어 제조사에서 물류가 들어왔다.

지하창고 가득한 이 고무덩어리들을 팔아내야 내 월급이 나온다고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했다.


2014년,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그 해, 나는 자동차 타이어를 택배로 보내기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지방의 타이어판매 및 자동차 정비업을 하는 회사에서 일을 했던것이다.

자동차 정비업을 하는 대부분의 업체들은 영세하지만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여기는 특정 타이어 제조사의 지역 총판을 맡을 정도로 규모가 있는곳이었다.

타이어 전문점 매장도 운영하며, 지역 카센터에 타이어를 공급하고, 인터넷으로 판매도 했다.


거기서 나는 영업부 소속의 개발자였다.

자사몰(쇼핑몰) 제작, 인터넷 판매가 주요 역할이었다.

개발자로서 취업을 하긴 했지만, 웹사이트 및 전산 개발보다는 잡다한 일을 더 많이 했던것 같다.

본점과 지점이 있었는데 모든 매장의 PC 등 여러가지 오피스 장비 관리, 매장 관리 및 사무업무 보조, 자사몰이나 옥션, G마켓 등 오픈마켓에서 상품이 팔리면 택배 업무, 고객 응접실을 포함한 사무실, 화장실 등 청소.

그래도 개발일만 하는 회사보다 몸쓰는 일이 많아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했다.


일상적인 일은 눈에 보이는대로 하면 되고, 개발 및 운영은 내가 설정한 일정대로 하면 됐다.

영업사원과 같이 일을 하고 있지만, 나의 고유업무가 영업인것은 아니라서 실적 압박도 없다.

'이게 정말 개발자가 할 일이 맞나?'하는 의문과 함께 정체성 혼란으로 오는 괴로움 빼고는 괜찮았다.

개발보다는 잡일에 치여사는 시간이 많았지만, 마냥 개발에 손놓고 있었던것은 아니다.


사람 손에 잡히는 제품을 파는 모든 업종의 사업은 재고관리가 문제다. 특히 매장 판매와 거래처 납품, 인터넷 판매를 병행하는곳은 그 복잡도가 몇배로 증가한다. 심지어 지역 매장을 점차 늘려 나가면서 본점, 지점간 물류도 신경써야 했다.


처음엔 업무환경이 쉽지만은 않았다.

인터넷 고객들은 하루만 배송이 늦게와도 난리가 난다.

인터넷에서 주문한 타이어를 장착하려면 카센터 예약을 해야 하는데, 배송 미스가 나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넷 배송으로 나갈 예정인 상품을 현장에서 쓰거나 영업이 거래처로 가져가버리면 난감한 상황이 펼쳐진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내 직원들이 공통으로 사용할 재고관리 솔루션을 만들고 현장직들과 업무 방식을 조율했다.

완전히 해결하진 못했지만 사람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창고에서 물건 찾기 프로세스 또한 개선했다.

이를 통해서 매장 판매, 거래처 납품, 인터넷 판매 모두 물량 미스가 나는일을 최대한으로 줄일 수 있었다.


이미 유명한 타이어 전문 쇼핑몰이 없었던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나름의 팬층이 있었던 타이어 전문 쇼핑몰도 만들어냈다.

에너지 소비효율과 타이어 제품마다 승차감, 마일리지, 접지력 등 특장점을 수치화해서 시각화 했더니, 사람들이 좋아했고 문의를 많이 줬다.

같은 지역의 자동차 정비소들은 내가 만든 쇼핑몰에서 정보를 보고 차주들에게 영업을 했다.

당시에는 부담스러운 유명세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감사한 일이다.


이렇게 세상에는 소프트웨어 개발 업종이 아니지만 개발자를 필요로 하는 일자리가 존재한다.

꼭 소프트웨어 자체가 제품이 아니더라도 소프트웨어를 통해 매출이나 최적화에 도움이 되는것이다.

소프트웨어 개발사가 아니라면 개발자는 IT 전문가를 대표하는 입장에서 일하게된다.


IT 전문가라고 소속된 회사의 일과는 동떨어져서 코딩이나 시스템 관리 업무만 볼 수 있는것은 아니다.

회사마다 밥벌이를 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를테지만, 중요한 위치에 오를수록 회사의 비지니스에 가까운 일을 해야한다.


나의 경우는 인터넷 판매와 고객 전화응대였다. 극도의 내향 성향인 나에게는 정말 싫고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개발자로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최초로 실제 '고객'과 가장 가까이서 호흡했던 경험이었다.

나는 어떠한 일을 하던, 어떠한 위치에 있던 개발자로서 있고자 했고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대부분 고객의 전화 목적은 자신이 필요한 타이어 모델 및 사이즈가 재고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응이다.

타이어 제조사로부터 물류가 오려면 몇일이 걸리기 때문에 미리 확인이 필요하다는 공지를 올려놓아서이다.

그 외에 가끔 주행성능이나 승차감, 특수차량 목적의 타이어를 상담하는 고객도 있다.

제품 상담은 현장의 베테랑이 더 잘할테지만, 그들이 일일히 전화응대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때 회사를 대표하는 입장에서 취급 제품에 대한 장단점을 설명하고 구매로 이끌어내야한다.

현장의 전문성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데이터에 입각한 설득을 하는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익숙하지 않아도 타이어와 자동차에 대한 기술과 제품에 대해서 공부해야한다.

현장의 부담을 덜어주는것도 영업부서가 해야할 일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영업 활동에서 시작되고,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는 과정에서 다양한 일이 파생된다.

식당을 예로 들자면 음식 주문, 요리, 서빙, 계산. 전체 과정이 고객의 서비스 경험이다. 입장 하기전 웨이팅, 음식 주문을 하기 까지의 대기시간, 음식의 맛, 서빙을 받을때 종업원의 태도. 고객에게 가치를 전달하는 모든 과정이 서비스이며, 서비스 품질이 회사 매출에 영향을 미친다.


품질(Quality)은 다양한 산업에 적용되는 개념이라 같은 기준에서 정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경쟁사 대비 얼마나 고객이 지불하는 재화 대비 만족을 주었냐 정도의 의미로는 모두 동의할것이다.

회사가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 범위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스스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성장해야한다.


개발자가 사회에 제공하는 가치는 정보기술을 이용한 문제해결 능력이다.

그 주된 방법이 고객이 필요로 하는 소프트웨어 제공이고 이를 위해서 코딩을 한다.

그러나 코딩만이 개발자의 일이나 정체성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직업인이 자신의 전공에 해당하는 일만 하지는 않는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사원의 모습에 맞게 새로운 영역의 능력을 배워 주특기와 융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

그것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더 가치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개발자에게 고객은 월급주는 회사의 고객일수도 있고, 회사나 고용주, 동료가 될수도 있다.

정보기술을 이용해 고객과 조직의 문제점을 해소하는 서비스직인것이다.


회사와 주변인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측면으로 생각하면 일과 커리어에 대한 관점이 달라질것이다.

단기적으로는 소속된 조직 하나에, 장기적으로는 더 많은 고객을 위해 서비스하는 입장으로 성장할 수 있다.

문제는 내가 목표에 비해 얼마나 성장하고 준비되었느냐뿐이다.

당장 월급을 얼마 받는다는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많은 개발자들이 눈앞의 일과 코드에만 관심이 있지, 이 일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관심이 없다.

일상적으로 코드를 생산할 뿐이다. 스스로 소프트웨어 제조사의 생산라인을 자처한다.

일의 규모 자체가 커진 덕분에 심리적으로 고객과의 접점이 너무나 멀어져 버린 탓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면을 보면 단지 '일을 늘리고 싶지 않다'라는 이기심만은 아니다.

대부분의 소프트웨어 개발 현장에서 일을 끝내는데 충분한 시간조차 부여 받지 못한다.

그래서 정신없이 코딩하기에도 바쁜 나날을 보내곤 한다.


일은 잘 해야한다. 어쩔수 없다. 하지만 코드를 생산하는 일이 너무 익숙해져 버린 나머지, 무감각하게 코드를 생산하는 기계가 되면 안된다.

정작 한숨 돌릴수 있는 상황이 와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시간만 보내게 될것이다.

우리는 감정이 있고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시간이든 제품의 퀄리티든 부족한 부분을 똑바로 직시하자.

문제점을 명확히 도출해서 개선할 방법을 찾아야한다.

당장 한줄의 코딩을 하는것보다 중요한것을 놓치고 있을 수 있다.


'물경력'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경력직이지만 인력시장에서 경쟁력이 없는 사람을 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회사내에서 일을 가려서 받고, 한가지 일의 전문가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본질은 경험에 비해 사회가 원하는 가치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사무행정직에서 대리가 분석을 못하고, 과장이 기획을 못하는것과 같다.

개발자는 고급이 되어도 분석설계를 못하고, 특급이 되어도 사업을 만들거나 컨설팅하지 못하는것에 해당한다.

이러한 능력은 단순히 등급이 바뀔때까지 코딩만 열심히 한다고 얻어지는 능력이 아니다.


목표를 정확히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것을 학습하고 경험해야한다.

학창시절 한 과목만 배우지 않듯이 사람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다양한 것을 배워야한다.

음식물이 소화되는데 시간이 걸리듯이, 배운것이 내면화 되려면 세월이 필요하다.


국내외로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한 스타트업 회사들은 공통점이 있다.

잘하는 일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성장의 진통을 충분히 감내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는 점이다.

단지 '앱을 하나 만들었는데, 시대를 잘 타서 큰 돈을 벌었다'가 아니다.


운이 좋지않았거나 환경이 맞지 않아서 나의 기여가 빛을 발하지 못할 수 있다.

당장 안되는 일에 마음쓰기 보다는 해야할 일을 하고 앞으로 나아가자.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내 일을 사랑하고 더 잘 할 수 있도록 성장해야한다.

자신의 성장을 위해 일을 한다면 엉망으로 일을 할 수 없다.

이는 장기적으로 회사를 위해서도 좋은 영향력을 미치게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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