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반, 설렘 반
한국에서나 독일에서나 첫 출근은 언제나 떨린다.
처음이라는 단어는, 자체에서 풍기는 설렘과 떨림의 감정 때문에 어떤 단어에 붙여놔도 동일한 효과를 자아낸다.
비로소 겨울이 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첫눈,
기쁨은 잠시, 부모님 선물과 친구들에게 취업턱 한번 쏘면 사라지는 통장 속 귀여운 첫 월급,
심장박동은 200bpm이지만 침착함을 유지해야 하고 처음이지만 처음 아닌 척해야 하는 첫키스,
어렸을 적 소수의 사람만 성공하고 대부분은 실패의 쓴 맛을 느끼는, 남자라면 한평생 잊지 못하는 첫사랑,
그리고.. 첫 출근..??
알람이 울리마자 벌떡 일어났다. 전날 계획한 대로 착착착 준비하고 통근 열차에 올랐다.
그 느낌 아는가. 중요한 날을 앞둔 날이면, 전날 몸은 잠을 잤는데 뇌는 잠을 안 잔 듯이 멍한 상태. 새벽 내내 뇌의 감각 및 신경 세포가 각성한 채로 있다가 중요한 날 당일이 돼서야 푹 쉬었어야 할, 그래서 최대한 성능을 발휘해야 할 뇌가 멍해져서 제 역할을 못하는 느낌. 수능 당일에도 그랬고, 입대 날에도 그랬고, 회사 면접날에도 느꼈던 그 느낌. 막 엄청 긴장되진 않는데 뭔가 놓칠 것 같은 맹한 느낌말이다. 그런 멍한 상태에서도 길은 헤매지 않고 잘 찾아 회사에 20분 일찍 도착했다.
9시가 되자 인사담당자가 다가와 나를 데리고 각 층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직장동료들에게 인사를 시켜줬다. 처음엔 긴장되어 그 간단한 Nice to meet you 도 쭈뼛쭈뼛 무미건조하게 했는데, 반복만 한 스승은 없다고(손흥민선수의 아버지 손웅정님 말씀) 세 개의 방을 돌고나자 점차 자신감이 상승했다. 모든 방을 돌고 마지막으로 나의 면접을 보고 합격목걸이를 주신 CIO 방에 가서는
“Schön dich wiederzusehen.”
(다시 봐서 반가워요.)
미리 연습해 놓은 독일어 한 방도 먹여줬다. 그 후 내 자리에 가서 앉았는데, 엄청 큰 일을 끝낸 듯 벌써 지쳐버렸다.
한국에서는 동료들과 나가서 먹거나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게 보통 일상이었는데, 여기는 집에서 먹을 것을 가져오거나 마트에 가서 먹을 것을 사 와 같이 먹는다.
점심을 먹으며 "넌 어디서 왔어?", "독일은 처음이니?" 등의 호구조사 겸 수다를 떨던 와중 한 동료가 "너 보험은 들었니?" 라며 질문을 했다. 독일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드는 Haftpflichtversicherung이라고 불리는 일상생활배상 책임보험이란 게 있다. 가령 길을 가다가 사람을 치어서 그 사람이 넘어져 머리를 다쳐 장애판정이 났다 하면,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치료비, 위자료 등을 지급해줘야 하는데, 위 보험이 없다면 한 순간에 인생이 망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 진지하게 보험얘기를 하다가 어떤 한 동료가 "독일에 온 걸 환영해. 첫 출근 점심시간부터 보험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지?"라고 하자 모두들 피식 웃었다.
나는 속으로 '훗. 이것이 독일식 개그인가? 순박한 친구들이구먼!' 생각하며 같이 피식 웃었다.
나는 9시에 출근을 했으니 6시에 퇴근을 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그랬다. 8시간 근무, 1시간 휴식.
그런데 웬걸, 한창 일을 배우고 있던 오후 4시 반. 동료들이 하나둘씩 짐을 싸고 Tschüss(안녕) 하며 퇴근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나만 첫 출근이라 9시까지 오라고 했던 거지 다른 동료들은 7시 반에서 8시 사이에 출근했고 법정 휴게시간이 1시간이 아닌 30분이라 각자 쉴 만큼 쉬고 나면 4시~4시 30분이 되면 집에 갈 시간인 것이다. 이것도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지만, 더욱 충격적이었던 거는 오늘 첫 출근한 신입사원인 나만 남겨두고 모두가 먼저 퇴근을 해버린 사실이라 할 수 있겠다. 첫 출근이니 일찍 들어가도 좋다는 말도 없이..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나는 어찌 됐든 출퇴근 시간은 지켜야 했고 오후 6시가 딱 되자마자 짐을 싸서 사무실을 나왔다.
너무 피곤했다. 영어로 대화하니 뇌가 2배는 더 일한 느낌이라 집에 와서는 정말 녹초가 돼있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재택근무를 해서 그런지 사무실 분위기는 차분하고 조용했다.
한 가지 정말 놀라움을 느꼈던 부분은 바로 직장동료들의 영어실력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아 나중에 글을 따로 쓸 생각이다. 여기서 짧게라도 말하자면, 20대 직원부터 50대 직원까지 모두가 영어를 유창하게 해서 정말 놀랐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독일 회사다. 나를 포함한 극소수의 사람만 독일어를 못하지, 나 같은 부류의 직원과 대화하는 경우가 아니면 모든 대화는 독일어로 진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영어를 잘한다.. 한국에서 10년 이상을 영어공부를 하며 대기업에 들어가도 영어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은데 여기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을 보니 자극+현타+동기부여 3종 세트 선물을 받은 느낌이다.
새로운 일터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일을 이제 막 시작하려 한다.
걱정 반 설렘 반, 이 감정이 정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