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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별 Feb 27. 2024

사랑의 과정 2

태어나서 처음 받아본 깊고 고요한 사랑


영화로 더 많이 알려진 박범신의 ‘은교’라는 소설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사랑의 정의는 당신에 대한 마음이 어떠하다는 미사여구가 아니라, ‘은교‘라는 사람 그 자체라고.


그 사람에게 나는 무려 11년 만에 만난 여자친구였다고 한다. 후에 만난 그 사람의 친구들이 그 사람을 구원해 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아니면 내가 순진한 걸 수도 있지만 그냥 믿기로 했다. 처음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서툴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나는 그런 사랑을 처음 받아봤다.


이 남자는 나보다 몇 살 많을 뿐이었는데, 마음이 성숙하고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도 아주 깊고 고요한 울림이 있었다. 나를 내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고, 세상의 어떤 잣대를 들이밀기보다 그냥 서로가 서로이기에 좋은 그런 만남이 이어졌다.


두 번째 만난 날, 우리는 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하필이면 그 당시 보기로 한 영화가 야하고 잔인한 ‘300’의 속편이었다. 헐벗은 스파르타 군인들이 빨래판 복근을 자랑하며 뛰어다니고, 적장으로 나오는 프랑스 여배우 에바그린이 전장 중 배 위에서 “나랑 섹스를 하자.”며 주인공을 꼬시는 장면 등 민망한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어색한 사이에, 당황한 그 사람은 그 당시 유행하던 드래곤푸르츠 음료수 뚜껑을 못 열고 있었다. 내가 자주 마시던 음료수라 요령을 알던 내가 단박에 뚜껑을 따주자 우리는 서로 잠시 더 어색해졌다. 나중에 들어보니 오히려 내가 내숭과 가식이 없어 보이고, 왠지 믿음이 가서(힘에 대한 믿음?) 더 좋았다고 한다.


세 번째 만남에서 우리는 서로 아버지를 여읜 지 삼 년이 되었으며, 공교롭게도 그 기일이 한 달 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 않았나. 둘 다 아버지를 여읜 집안의 착한 첫째들이라 그런지 서로의 어깨에 올려진 무거운 짐의 무게를 공유하게 되었고, 그때 마음의 장벽이 탁 허물어지는 것을 동시에 느꼈다.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는데, 그 후로 모든 건 일사천리였다.


“지금 만난 지 백일만에 웨딩 사진을 찍겠다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우리는 만난지 두 달 만에 양가 어머님들에게 결혼 승낙을 받고 6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시댁 근처의 커피숍에서 처음 뵌 어머님은 내향적인 나와는 전혀 다른,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지니신 대장부셨다. 요샛말로 이 동네의 핵인싸라고 해야 하나. 동네에 맛집 사장님부터 부동산 사장님까지 우리 어머님을 모르는 분을 찾는 게 더 힘들었다. 어머님은 인상은 호랑이 뺨칠 만큼 세 보이셨지만 항상 웃는 얼굴에 상냥한 말투셔서 그 이질감에서 오는 매력이 남다르셨다. 어머님은 덜컥 결혼날짜를 잡아버린 둘째 도련님 때문에 혼자 남을 첫째 아들 걱정에 애가 타고 계셨는데, 이 느림보에 천하태평 아들이 갑자기 덜컥 결혼할 여자를 데려온다니, 그것도 나이도 한참 어린 여교사를 데려온다니 거의 나를 업고 다니실 기세셨다. 처음 만나 이런저런 것을 물으실 줄 알았는데, 대뜸 하신 말씀이 우리 어머니께 잘 말씀드려서 올해 안에 ‘결혼’을 좀 꼭 해보라니 웃음이 났다.


“자기는 우리 집에서 언제나 웰컴이야.”


라는 따뜻한 말처럼 어머님도, 남편도 나에게 무엇이든 오케이였다. 밑으로 동생들이 줄줄이 딸린, 모아둔 돈 하나 없는 계약직 여교사를 무조건적으로 환영해 주고, 너 하나면 된다는 남자를 내가 정말 만나다니. 남편 명의의 조그만 아파트가 곧 입주라 나는 정말 몸만 오면 되는 상황이었다.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 주고 정말 나 하나만 봐주는 그의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마음이 고마워 눈물이 났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곧 사랑의 정의가 된 기적같은 만남이 정말 나에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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