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럭셔리 회사 생존기
인생은 역시 삼세판이라고 했던가? 2년 반 째 하고 있는 석사 생활에 방점을 찍을 세번째이자 마지막 인턴을 프랑스 럭셔리 회사 HQ에서 하게 되었다. 여러 개의 럭셔리 브랜드를 소유한 거대한 그룹에 속해 있다는 점, 한국에서 제법 인지도가 높은 브랜드라는 점, 방돔 광장에 아름다운 매장을 가진 프렌치 하우스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포지션이라는 점까지 잘 맞춰진 퍼즐 조각처럼 무엇 하나 어긋남이 없었다. 하지만 기대가 커질수록 실망도 크다는 건 그간의 데이터로 확인이 된 바,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만큼 그 환상이 깨질까봐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현실은 기대보다 낫다는 것! 역시 그런 것들이 인생을 재밌게 만드는 걸까? 이 회사에서 일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두 달 동안 했던 경험들은 확실히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흥미롭고 다채로웠다. 일단 PR 팀의 유일한 외국인으로서,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 중에 하나를 모국으로 두고 있는 사람으로서 나만 할 수 있는 일들이 내 존재 가치를 증명했다. 입사 첫 달에는 전세계 기자들을 대상으로 새로 런칭한 하이 주얼리 컬렉션을 소개하는 프레스 행사가 있었다. 기자들을 맞이하고 행사장까지 안내를 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게 주된 업무였고 그 중엔 당연히 한국에서 온 기자들도 있었다. 기자로서 행사장을 방문한 적은 있어도 그 반대 입장은 처음이라 약간 어색했지만 한국어를 마음껏 쓸 수 있다는 사실이 긴장을 풀어주었다. 그제서야 떠올랐다, 나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을 좋아한다는 것을. 주어진 역할을 하는 내내 이 곳에서 일하는 유일한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이방인으로서의 소외감을 주기보다 오히려 나의 특별함을 돋보이게 해주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고, 그걸 알게 되어 기뻤다. 그 한 끗 차이가 사실은 전부인 게 해외 생활이니까.
무엇보다 글로벌한 브랜드의 본사에서 일한다는 건 그 자체로 동기부여가 될 때가 많다. 어떤 컬렉션이 출시될 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스케치 단계부터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전략 수립, 최종적으로 시장에 제품을 공개하는 모든 단계를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 곳에서 일하기 전에는 주얼리에 큰 관심이 없었고 상당히 현실과 멀고 막연한 분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일해보니 그 비현실적이면서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늘 곁에 둘 수 있다는 게, 그래서 가끔은 진심으로 감탄을 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PR 쪽 일을 하다 보니 브랜드에서 파는 제품에 자부심과 믿음, 애정을 가질 수 있다면 일하는 게 조금은 덜 고통스럽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업무 중 하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전세계 각국 프레스에서 우리 브랜드가 나온 기사들을 뉴스레터의 형태로 재편집하는 일이다. 전세계의 창작물을 볼 수 있다는 것, 특히 같은 제품을 가지고 잡지마다 서로 다른 비주얼적인 해석을 하는 것을 보는 게 흥미롭다. 잡지사에서 일할 때는 내가 비주얼을 만들고 창작하는 재미가 있었다면 반대로 PR 쪽에서는 이런 저런 커뮤니케이션을 거쳐 잘 차려진 결과물을 보고 뿌듯함을 느끼는 맛이 있다. 어쨌든 나에게는 내가 열심히 일한 결과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성취감을 주는지가 어떤 일을 좋아할 수 있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프랑스에 남고 싶은 이유는 늘 꾸준히 변해왔다. 그저 파리가 좋다는 이유기도 했고, 프랑스인들이 흔히 누리는 여유로운 일상 때문이기도, 매 년마다 돌아오는 한 달 간의 여름 바캉스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곳에서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럭셔리 산업의 중심인 도시에서 커리어를 꽃 피우고 싶다는 게 새로운 이유가 됐다. 여전히 일을 통한 자아실현이 중요한 내게 이 도시는 여전히 꿈을 꾸게 만들고 무엇보다 고생 끝에 찾아오는 보상의 달콤한 맛을 이제는 알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