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구직 시장은 차갑고, 나는 석사 학위를 가진 완벽한 백수가 됐다.
대학원을 졸업했다. 극심한 코로나와 함께 입학한 지 3년이 지났고, 마침내 올해 7월 졸업장을 받았다. 메일로 이름과 생년월일, 학위가 적힌 PDF 파일 하나를 받았을 뿐인데(정식 졸업식은 내년이다) 제법 마음이 벅찼다. 3년 동안 학교 수업을 받은 건 1년 반, 나머지 1년 반은 서로 다른 회사에서 세 번의 인턴을 하며 보내서 그런지 졸업 자체에는 별 감흥이 없을 것 같았는데 그래도 제법 뭔가를 이뤄냈다는 성취감이 들었다. 동시에 졸업을 했다는 것은 더 이상 프랑스에 남아야 할 대외적인 이유가 사라졌다는 의미 같기도 해 혼란스러웠다.
럭셔리 회사에서의 마지막 인턴십 경험 후에 찾아온 헛헛함이 제법 오래갔다. 사수의 승진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내게 기회가 주어질 뻔했으나 다른 지역 매니저가 갑작스레 그만두는 바람에 조직 개편이 있었고 메종에 남을 기회가 사라졌다. 그간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무방비하게 무너졌다. 계약 연장을 위해 미친 듯이 열심히 했고 인턴 중 유일하게 칸 출장까지 다녀왔는데 이렇게 발버둥 쳐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프랑스에서 영영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하다 보니 도무지 남을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지난 3년을 딱히 공백 없이 - 7월이면 인턴을 시작했으니 따로 방학도 없었다 - 달려왔는데 일도 공부도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게 두려웠다. 그렇게 파리를 떠나야 할 때가 온 건가를 고민하던 몇 달이 지나고 나는 여전히 무직 상황을 견디며 파리에 남아 있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덜 흔들리는 상태로.
마지막 인턴십이 끝나고 팀 회식에 갔을 때 이와 같은 문제로 고민하던 내게 팀 디렉터는 너는 좋은 학교도 다녔고 대기업에서 일했던 경험도 CV(이력서)에 있는데 일을 못 구할 리가 없다며 자기가 아는 사람들에게도 혹시 팀원을 구하고 있지 않은지 물어보고 있다고 좋은 자리가 생기면 꼭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고맙게도 그는 내게 기꺼이 추천서도 써줬다. 프랑스에서는 추천서의 힘이 강한 만큼 받기가 힘들다고 들어서 이 정도 서포트를 받았다면 그에 보답하는 길은 나 역시도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다해보는 거라 생각했다. 그날 저녁, (계약 종료를 앞두고 땡큐카드와 꽃다발을 보내준) 커뮤니케이션 전체 팀 디렉터도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나의 계획을 물었고, 일단 파리에 남을 것 같다고 하니 당연히 그래야 한다며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계속 연락을 하라고 덧붙였다. 이런 반응들은 확실히 내가 타지에서 쌓아온 경험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했다. 사실 프랑스인도 취업이 어려운 상황에서 외국인인 내가 벌써부터 포기하고 돌아가기에는 여태까지 해온 게 아깝기도 했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매몰비용이라 선택에 고려를 하면 안 되겠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내가 외국인이라는 한계를 딛고 갈고닦아 놓은 기반을 버리는 게 쉽진 않다. (이렇게 영원히 가능성의 늪에 갇혀버린다면? 그것 또한 무섭지만)
그리고 프랑스에 정규직으로 한 번 취업하면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를 거의 못 봤다. (진짜 진짜다!) 얼마나 좋길래…? 나도 겪어봤지만 주변에 회사를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물론 자잘한 일상의 스트레스를 받긴 한다. 매일매일이 파라다이스인 곳은 없다. 그렇지만 휴가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다. 여름 한 달을 쉬고 오면 모든 스트레스가 리셋되고 일 년을 그럭저럭 버텨낼 힘이 생기는 것 같다. 하긴 인턴 때 월차를 모아 1주일 연속으로 쉬는 것도 짜릿했는데 한 달은 상상만 해도 심장이 뛴다. 그리고 여름 한 달 뿐이겠는가, 1년에 눈치 안 보고 연차 45일이면 여름, 크리스마스, 연말연초, 평소에도 많은 게 가능하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일을 해본 입장으로서 ‘대체 어떤 느낌일까?’하는 호기심이 반이고 나머지 반은 내가 그런 라이프스타일을 너무 좋아하게 될 거라는 확신이다. 나이를 먹어보니 좋은 점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게 될지 예상이 가능하다는 것과 그 예상이 틀릴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나는 돈을 덜 벌어도 많은 휴가가 있는 삶이 좋다. 그러니까, 이런 걸 아는데 어떻게 포기를 해. 그것도 내가 꿈꾸던 삶이 정말 코앞에 온 것 같은 상황이라면. 그리고 정말 간절히 원하는 걸 쉽게 얻는 것은 그것의 매력을 떨어트린다. 경험의 데이터가 쌓여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렵게 얻은 것일수록 감동이 배가 되거든. 감동을 위한 원기옥을 모으고 있는 셈 치기로 했다. 정말이지 나의 강점은 선택에 대한 자기 합리화를 지나치게 잘한다는 점이다.
최근 읽은 책 <결심이 필요한 순간들>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다.
이 시에서 하인은 딜레마에 봉착했을 때 결심이 서지 않으면 동전을 던지라고 말한다. 동전의 결과를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지금 바라는 게 뭔지” 알아내기 위해서다. 일단 동전이 돌아가기 시작하면, 내가 지금 어느 쪽의 결과를 바라고 있는지 느낌이 올 것이다.
동전을 던져보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내 동전이 프랑스에 살기 쪽으로 나오길 바랄 것 같아 그냥 그러기로 했다. 어쨌든 비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시간이 내게 허락하는 한은. 내가 가는 방향이 맞다는 확신이 있으니 조금 느려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다만 프랑스에 유학을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얘기는 꼭 해주고 싶다. 꼭 끝까지 가 볼 생각으로 오라고. 어떤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나면 원래 알던 세계로 돌아가는 것 또한 용기를 필요로 하니까 오도 가도 못하는 어느 지점에 갇히고 싶지 않다면 신중해야 한다고.
(별첨 1)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본 글에 적합한지 모르겠지만 덧붙인다. 막연히 이런 팁을 모은 글을 쓰고 싶으면서도 언제가 될지 모르겠기 때문에.
구직 시장에 뛰어든 후 더욱 뼈저리게 드는 생각은 프랑스에 취업하고 싶다면 무조건 자기가 원하는 업계의 다양한 회사에서 경험을 쌓고 네트워크도 확실히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는 사람이 많아야 자리가 났을 때 바로 연락을 받을 수 있고 실제로 본인이 인턴을 했던 회사에서 바로 정규직을 받지 못해도 나중에 언젠가는 그 회사로 돌아가는 경우가 제법 많기 때문이다. 나도 졸업 전에 다른 메종에서 한 번만 더 인턴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지속적으로 든다. 인턴만 세 번을 했으면서도.
프랑스에서 네트워킹의 중요성은 아무리 말해도 부족하고 이런 것에 부담을 느낀다면 프랑스 취업을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봐야 할 정도다. 물론 전문성이 더 강한 분야라면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지만 나처럼 경쟁자가 수두룩 빽빽한 럭셔리 업계, 그리고 마케팅 & 커뮤니케이션 쪽 일을 지망한다면 무조건 관계망을 잘 형성해 둬야 한다. 그렇게 촘촘한 거미줄을 짜놓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적당한 타이밍이 오면 탁! 기회를 낚아야 한다. 그것이 요즘 내가 하는 일이다.
(별첨 2)
어쩌면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 마음이 덜 불안한 걸 수도 있다. 남의 선택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한다는 것은 삶의 균형을 적절히 맞춰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머릿속이 견딜 수 없이 무거워질 땐 튼튼한 두 다리로 완연한 가을을 뛰어다닌다. 그럼 몸은 피로로 천근만근 무겁지만 머릿속은 날아갈 것처럼 가볍다. 이런 균형. 아무튼 요즘엔 ‘나’에 집중한 삶을 살고 있고 그것이 삶을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