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의파랑 Nov 17. 2023

슬픈 날에는 요리를 한다

한 끼를 해 먹으며 받는 생의 위로

가끔 인생은 놀라우리만치 잔인하다. 아무것도 먹기 싫고 음식을 생각하면 속이 울렁거릴 때조차도 생에 대한 욕구는 어찌나 강렬한지 이대로 죽기는 너무 비참하다는 생각에 꾸역꾸역 장을 보고 요리를 한다. 가끔 마트에 혼자 서 있는 내가 지긋지긋하고 싫을 때도 있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으려 악착같이 버티기 위해서는 아무리 무기력한 날일지라도 끼니를 챙겨야 한다. 그러다 보니 요리를 좋아하지도, 즐겨하지도 않던 내가 이것저것 뚝딱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예전에는 요리를 그저 귀찮은 일,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 정도로 생각했다면 최근에는 요리를 하는 과정 자체에 큰 위로를 받을 때가 많다. 특히 한식을 만들어 먹으면서는 어쩔 수 없는 그리움까지도 한 끼에 흘려보낼 수 있게 됐다.



며칠 전에는 프랑스에 온 후 처음으로 친구랑 김치를 담갔다. 김치를 담그는 일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냥 사 먹으면 되는 걸 굳이 일을 벌일 필요가 있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올해는 달랐다. 어차피 크게 할 일도 없는 지루한 하루하루를 지내던 중이었기 때문에 친구가 같이 김치를 담가보겠냐고 물어봤을 때 제법 솔깃했다. 그렇게 해서 생각보다 간단한 레시피로 일을 벌이기로 했고 우리 집보다는 훨씬 다양한 장비들이 가득한 친구네 집으로 가기로 했다. 아침 일찍부터 장을 봐서 배추 세 포기와 다양한 채소와 양념들, 그리고 김치를 다 담그고 함께 먹을 수육 고기도 샀다. 교외에 사는 친구네는 최근 이사하고 처음 가보는 것이었는데 한층 넓고 쾌적했으며 주변도 한가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곳이었다.


우리는 먼저 도착하자마자 점심으로 라면을 해 먹었다. 각자가 선택한 라면에 각자가 원하는 고기와 야채 토핑을 선택해서 서로 다른 입맛에 맞게 요리를 했다. 처음에는 냄비 세 개를 써야 한다는 점에서 다소 회의를 느꼈으나 서로 다른 취향의 결과물을 보는 재미가 있었고, 간단한 음식이지만 제법 정성이 담긴 맛이 나서 좋았다. 주말까지 지나치게 효율적일 필요는 없으니까. 밥을 다 먹고 간단한 커피 타임을 가진 후, 우리는 함께 배추를 씻고, 자르고, 굵은소금을 팍팍 친 물에 배추를 재웠다. 배추의 숨이 죽을 때까지 시간이 필요해서 그동안 수다도 떨고 재료를 손질하며 양념도 만들어 두었다. 손이 가는 일이 많아 피곤하긴 했지만 끊임없이 소일거리를 하면서 친구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았다. 오히려 수다만 떨다 보면 이야깃거리가 떨어지거나 떠들다 지쳐 잠시 늘어질 때가 있는데 일을 하면서 얘기도 하니까 대화를 끊고 또다시 시작하는 게 한결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시간과 공을 들여 배추와 양념을 꼼꼼하게 버무리고 나니 우려했던 것과 달리 맛이 훌륭했다. 처음 내가 주도적으로 끓어본 수육도 그랬다. 사실 한 번도 다 같이 먹을 요리를 도맡아서 해본 적은 없어서(친구들이랑 있을 때는 주로 보조 역할에 충실했다) 큰 책임감과 부담을 느꼈지만 걱정과 달리 맛이 아주 좋았다. 그때의 성취감과 안도란! 내가 프랑스에서 배운 건 이런 거다. 지나치게 소소하다고 생각했던 일상, 때론 잘 꾸며진 소꿉놀이 같은 일이 얼마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지.


또 다른 날들에는 된장 배춧국을 만들어 먹었다. 파리의 겨울은 매일매일이 고행길이다. 아침과 오후, 저녁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가 매일 오고 해가 뜨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그럴 때면 아시아 마트에서만 볼 수 있는 달큼한 배추를 한 통 사서 다섯 잎씩 잘라 된장국에 풀어넣는다. 푹 끓여 흐물흐물해진 배춧잎들과 뜨끈하게 몸을 데워주는 된장국은 일상의 피로를 녹인다. 카레는 또 어떤가? 한동안 카레를 해 먹지 않았다가 친구가 카레를 만들어 먹었다는 말에 오랜만에 고체 카레 큐브를 샀다. 카레의 미학은 맛이 아닌 요리의 과정에 있다. 채소 칼로 감자, 당근 등 필요한 채소를 다듬고 작은 정육면체 모양으로 싹둑싹둑 써는 반복적인 작업을 계속하다 보면 머릿속을 꽉 채우던 일상의 고민도 하나하나 자리를 뜬다. 그렇게 손질한 고기와 야채를 넣고 냄비에 카레를 끓이는 동안 작은 원룸 방을 가득 채우는 카레 향에 안락함과 편안함을 느낀다. 집에 감돌고 있는 카레 향이 마치 험난한 바깥세상으로부터 나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것 같달까?



인생에 뭔가 큰 것을 이루고 싶다는 야망에 눈이 멀어 놓치고 살았던 소소한 일상들이 많다. 하지만 살다 보니 인생은 그런 거시적인 것들에 좌우된다기보다는 얼마나 하루하루를 알차고 풍성하게 보내는지에 달려있는 경우가 많았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 보다 단단한 내면과 주변인의 사랑, 그리고 안온한 일상 같은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직도 배워가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