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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경 Mar 10. 2024

끌려다니는 마음 04

수련을 했다.

아쉬탕가가 아닌 하타 수련을 했다.

(하타- 제주도의 한주훈 선생님 식의 하타 요가가 한국에서는 지배적인 하타 수련 방식이다.

후굴 위주의 부동이 긴 수련)


아쉬탕가보다 하타에 나는 더 약하다.

아무래도 후굴이 약한 탓이다.

그리고 끈기도 부족한 성격이기에 부동하는 것도 고역이다.


사실 하타 수련을 하고 난 후에 뿌듯한 마음으로 오늘 수련 너무 좋았어!라고 생각했던 날들은

별로 손에 꼽히지 않는다.

나는 대부분의 하타 수련은 그저 그런 만족감을 가지며 집으로 돌아간다.

내 후굴은 아주 천천히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주 강력하게 마음에 남는 날이 있다.

바로 수련이 너무너무너무 (feat. I.O.I) 안 되는 날.

그날따라 부동이 너무 힘들었고 후굴이 각성되지 않았다.

호흡이 버거웠으며 자꾸만 내려놓고 쉬고 싶었다.

집중이 되지 않고 잡생각으로 머릿속이 들끓었다.


그런 수련을 했다.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러 약속 장소로 향하는 내내 짜증스러웠다.

누가 오늘 내 수련에 대해 뭐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나 혼자 한 시간 반동안 채찍질을 했나 보다.


매트 위에서 모든 감정을 쏟아붓고 다시 일상 속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나는 그러질 못했다.

기분이 나아지질 않았다.







부동이 긴 하타 수련은 아쉬탕가와 분위기부터 다르다.

아무 소리 없이 선생님의 어저스트먼트만 있는 아쉬탕가와 달리

하타 수련은 선생님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여러분 끝나고 뭐 하실 거예요?

이런 질문을 한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요가 강사가 되면 이런 식의 질문을 수련생들에게 하긴 할 것 같다.

내가 강사가 될 수 없는 이유_01)


힘든 아사나 속에서 이완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우리가 고통에만 너무 집중되지 않도록

정신을 조금이나마 다른 곳에 가져 볼 수 있도록 여러 말씀들을 해주신다.


선생님의 말씀들은 실제로도 힘든 부동을 그나마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주고

내가 요가를 하는 이유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촉매제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중 내가 깊이 공감을 했던 부분은 이러했다.


‘아사나에 집착하지 마세요. 아사나를 잘한다고 해서 요가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초보자, 중급자, 숙련자라는 단어에 휩쓸리지 마세요.

본인의 몸을 잘 컨트롤하는 사람이 숙련자입니다.

내 몸을 바라보고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요가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비슷한 말씀들을 여러 번 해주셨다.

나는 들을 때마다 공감을 하였지만,

언제나 그렇듯 현실 세계로 돌아가면 휘리릭 하고 까먹곤 한다.




그날도 그랬다.

나는 분명 내 몸을 인지한 상태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수련을 하였다.

그러나 매트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나 자신을 미워했다.

평소보다 노력하지 않은 나 자신이 미웠고,

내가 하지 못한 아사나들에 대한 집착이 일었다.


그래서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한 채로 약속 장소에 가는 길 내내 그렇게 나를 미워했었다.







나는 늘 딜레마에 빠져 있는 상태다.

아사나에 집착하지 말자 하면서도 집착을 하는 굴레.

마음을 컨트롤해 보자 하면서도 쉽게 끌려다니는.


일단 아쉬탕가부터가 그러하다.

내가 현재까지 수련하고 있는 진도의 아사나를 잘해야만 그다음 아사나로 나아갈 수가 있다.

자연스레 아사나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는 게 되는 시스템인 것이지!

수련을 복기할 때마다 오늘 나의 드롭백은 어떠했는지,

어제의 나의 수련보다 나아졌는지 늘 고민하게 된다.


수련 후 도반(함께 수련하는 수련생들을 도반이라고 칭한다)들이 선생님과 나누는 고민들을

엿들으면 아쉬탕가 도반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예전에는 이만큼 잘했었는데, 부상을 당한 이후로 혹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내 실력만큼의 수련이 되지 않아 속상하다고.


나도 같은 감정을 일주일에 몇 번씩 겪고 있다.

어제 컨디션과 오늘 컨디션은 항상 다르니까.


아쉬탕가뿐 아니라 하타 수련에서도 주변 숙련자들이 막힘 없이 해내는 아사나들을 보며

내 몸은 왜 이리 느리게 발전하는 것일까 하는 속상한 마음에 사로잡힌다.


매트 위에서만 속상해하면 되는 데 문제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SNS 속 나의 피드는 요가로 가득 차있고

그 피드 속에서는 화려한 기술을 가진 요기니들의 아사나가 스크롤을 내릴 때마다 장식되어 있다.

지금 당장 내가 그들을 따라 할 수도 없는 실력이란 걸 알면서도,

당장 눈에 보이는 그들의 숙련됨에 저절로 나 자신과 비교를 하게 된다.


수련 중 선생님께서 열심히 말씀해 주시던 남들과의 비교에 관한 말씀들도 그때뿐,

정말 지겹게도 내 마음은 이리저리 끌려다닌다.



이러한 생각을 나 자신이 충분히 인지하고 있지만,

나의 종이 인형 같은 마음을 쉽사리 바꾸진 못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아마 평생 이렇게 계속 비교를 하며 살게 되지 않을까?

수련이 잘 된 날은 모든 게 다 잘 이루어질 것만 같은 마음을 갖다가,

또 어느 날은 좀처럼 몸이 따라주지 않아 너무나도 짜증이 나고 우울해지게 되는 마음을 갖게 되는

이러한 삶을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나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깊은 명상을 통해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깨달음을 얻는다거나,

책과 경전을 읽으며 요가 정신을 다시 고찰한다거나 하는 행동들은

내가 절대 하지 못한다는 걸 지나가는 개미도 알 것이다.


사실 감정을 다스리기보다는 감정에 휘둘리는 쪽에 가까운 나이기에

이를 조절해 보겠답시고 하는 행동들은 무용지물일 것이고,

감정을 다스려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과정 또한 요가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이 종종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했고.


‘제3 자의 눈으로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과 현재 떠오르는 생각들을 초연하게 바라보라.’


그래서 나는 억지로 내 성격의 본질을 바꾸려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초연하게 바라보는 것도 못하는 심성이니까

그냥 지금처럼 기분이 나쁘면 나쁜 대로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있는 그대로 현재의 감정에 충실해보려 한다.


아사나에 집착을 하면 어떻고, 그날의 수련에 따라 기분이 좌지우지되면 또 어뗘라.

내 옆의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 또 어때.

비교하는 감정, 그리고 잘하고 싶어 하는 욕망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생기는 감정이잖아.

당연히 일어나는 감정들을 이겨내려 하기보단, 공존하되 금방 흘려보내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감정에 끌려다니는 나이지만 그래도 단순해서 금방 까먹을 자신은 있다.

계속해서 남아 있는 감정에 매달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소리이지.


초연해지지는 못할지여도 수련 후 먹는 맛있는 음식, 타인들의 수련 일지 속 속마음에서 공감 얻기 등

내가 할 수 있는 쉽고 빠른 방법으로 마음을 다스려 볼 것이다.

여태 자연스레 그래왔기도 했고.

나에게 독이 되지 않는 선에서는 휘청대는 이 마음과 스파링 한 판 붙어보려 한다.

이제 슬슬 복싱을 배울 때가 되었구나 싶네.


남들은 처음부터 마음이 끌려다니지 않을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이러한 내 모습도 내가 하는 요가 방식이라고 여기기에

나만의 방식대로 이어 나가보려 한다.

끌려다닐지언정 잠식되지 않도록 빠르게 탈출하는 나만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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