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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ille Oct 30. 2024

흘러가는 즐거움...암스테르담 보트 라이드

포르륵 포르르르륵~~.

전기모터를 사용하는 작은 하얀 보트는 정겨운 물결의 노래를 부르며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다리 위에서 봤을 때는 그저 시원해 보였던 운하의 풍경 속에 내가 들어와 물과 하나 되어 흐르고 있고, 다리와 뭍의 사람들은 풍경이 되어 스쳐간다...

2024년 여름, 한 달을 넘긴 암스테르담 여정의 마지막 순서는 운하의 보트 라이드였다. 암스테르담에는 75km에 이르는 165개의 운하와 1200개가 넘는 다리가 있다. 운하의 도시 베니스를 넘어서는 숫자다.

우리 숙소 바로 앞에 있는 국립 해양 박물관(Maritime Museum)은 과거 네덜란드 해군의 화물기지였고, 그 유명한 대항해 시대에 동인도회사의 깃발을 올리고 출항하는 무역(약탈)선들은 이 운하를 거쳐 바다로 나아갔다. 제국주의 침략 수탈의 선봉대가 출정했던 통로를 지금은 수탈자와 피수탈자의 자손들이 유유자적 향유하고 있고, 일주일 내내 열린 프라이드 퍼레이드에 하나 되어 환호하는 것을 보면, 'canal ring'이라 부르는 원형 운하의 별명처럼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인지도 모른다. 엔티제는 순간적인 PC의 사념에 빠져 보트에 오르다가 슬리퍼가 미끄러졌고 선장님이 내 팔을 붙들며 혼을 낸다.

"No slipers on my boat!"



우리를 보트에 초대한 분은 은발 같은 금발이 어울리는 초로의 보트 선장 스텔라였다. 우리나라에선 할머니로 대접받을 나이였지만, 외항선 선장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어린 시절부터 배와 함께 살아온 그는 '선장(skipper)'으로 존경받기에 충분했다. 슬리퍼 때문에 한번 혼났고, 무게 중심을 맞추고 줄을 매고 푸느라 세명의 초보 선원들은 혼쭐이 났지만 프로다운 엄격함과 능숙한 항해술, 배와 물과 사람을 사랑하는 그 모습은 그저 존경스러웠다. (그의 조상은 동인도회사의 일원이었을까?)


포르륵 포르르르륵~~. 포르륵 포르르르륵~~.

마음을 평온하게 가라앉히는 물소리, 아름다운 석양, 싱그러운 바람, 보트 라이더들의 상냥한 인사... 엔티제와 인프피, 스텔라의 친구인 M이 함께한 보트 라이드는 어느덧 흥이 올랐고 M은 관광 가이드 시절 암스테르담 빌딩들을 소개하던 '왼쪽을 보시면~' 멘트를 시전해 웃음을 자아냈다. 라이드 중간에 스텔라 선장은 커피를 마시고 가자며 카페의 발코니에 바로 배를 댔다. 배를 고정시키느라 또 한바탕 소동을 벌였지만 보트에서 영접한 커피와 프라이의 맛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스텔라 선장은 비교적 한적한 곳에서 내게 보트 운전을 해보라며 자리를 내줬다. 운전 실력이 베테랑급인 나는 이까짓 작은 보트가 뭐가 다르랴 라며 냉큼 운전대를 잡았다. 배는 갑자기 술에 취한 듯 정신없이 갈지자로 방황하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열렬히 응원하던 인프피는 안타깝게 나를 바라봤다. 결국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짧은 보트 운전 체험을 마감했다.

타이어와 도로가 접지된 자동차와 달리 보트의 키는 물결을 타야 하기에 반응 속도가 느렸다. 5초 혹은 그 이상? 천천히, 천천히, 키가 돌아가고 물결이 방향을 바꾸는 것을 허락하는데 필요한 시간. 알면서도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또 운전대를 조급하게 더 돌리는 나... 땅과 물의 페이스는 달랐고, 맡기고 기다리는 것에 서툰 엔티제는 첫 수영에서 마구 첨벙 대는 조급한 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때론 내가 방향을 정하고 달려야 할 때가 있고, 때론 물길을 타고 그저 흘러가야 할 때가 있다. 내 발로 방향과 속도를 정하는 노고에는 익숙하지만 나를 내려놓고 맡기는 일에는 서툴기만 했던 나. 흘러가는 즐거움, 물길에 나를 맡기는 관조의 여유와 자유함. 그 낯선 기쁨에 익숙해질 무렵 우리의 보트 여행은 끝났다. 스텔라를 도와 보트를 정박하고, 쿠션과 모터 배터리를 철거와 간단한 청소를 마친 후 우리는 산뜻하게 헤어졌다. 평생 운하를 누볐을 텐데도, 풍광이 바뀌는 굽이굽이마다 첫사랑의 탄성을 올리던 스텔라 선장의 목소리가 아직도 들려오는 듯하다.

암스테르담은 그렇게 엔티제와 인프피에게 귀한 작별 선물을 안겨줬다.


때론 즐겁게 흘러가기.

익숙한 것을 처음처럼 사랑하기.


네덜란드 친구 M, 인프피, 엔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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