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기말
사실 아직 기말 레포트가 남았다. 그런데도 레포트를 너무나도 쓰기가 싫어서 브런치를 열었다...
갓 발령났을 때는 교사들 사이에서 대학원을 가고, 무슨무슨 대회에 나가고, 연수를 듣는 게 주요한 자기계발 수단이었던 것 같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학교는 관리자가 젊은 교사들로 하여금 목표를 가지고 부지런히 여러 길로 나가보라고 권유하고, 의욕적으로 활동하는 교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더더욱 이런 인상을 가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대학원, 좀 더 구체적으로는 교대의 교육대학원을 향한 인기가 예전만하지는 않은 거 같다. 소위 말해서 '돈이 될만한' 과의 인기야 여전하다. 그 외는...글쎄...아무리 후기 대학원 모집은 전기 대학원 모집보다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어떤 과는 아예 지원자가 없단다. 이만하면 '전만 못하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지금도 연수와 각종 연구대회, 대학원에 대한 수요가 0인 건 아니다. 일정 수요는 늘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소위 말하는 '파이프라인'을 만든다든지, 조금이라도 돈이 될만한 일을 찾는 경우가 더 많아진 것 같다. 그게 모두 교육적인지는 모르겠다...뭐, 어쨌든 교사의 경험은 모두 교재로 쓰일 수 있다고 하니 일단 뭔가 플러스는 되겠거니. 그만큼 교사 월급으로는 각박한 현대사회를 살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당장 다음주에는 전교조 서울지부에서 청년교사들의 처우를 개선하라는 집회를 연다고 할 정도니까. 먹고 사는 문제는 신성한 문제다.
겸직허가를 받고 바쁘게 부업을 뛰는 이들을 보다가 이제 놀 거 다 놀았다고 어기적 대학원으로 기어 들어간 나의 생활을 잠시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남들 다 갈 때 안 가다가 이제야 가서 머리를 벅벅 긁고 지금도 별 거 아닌 기말 레포트 뭐 조금이라도 더 잘 써보겠다고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고 앉았다. 이렇게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뭘 얼마나 잘하겠다고.
그래. 뭘 얼마나 잘하겠다고 이러고 앉았는지. 대학원에서 뭘 그렇게 많이 배웠느냐고 물어본다면 '글쎄'다. 대학원을 가서 후회한다는 교사들의 증언 중에는 '대학원에 가서 배우는 게 없다'는 말이 많았다. 나도 배우는 게 없을까봐 걱정하기야 했다. 그런데...어쩌면 아주 오만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대학원은 배우는 곳이라기보다는 공부하는 곳이라는 감상을 강하게 받았다. 내가 뭔가 해가야 성장이 이뤄지고, 지적받고 틀릴 것을 걱정하며 아무것도 안 하면 배우는 게 없는 거다...
나는 화요일과 목요일에 수업을 들었는데, 목요일 수업에서 특히 이 점을 더 강하게 느꼈다. 매주 특별한 과제는 없었으나 언젠가 한번 짧은 글을 써서 들고 가자 교수님이 무척 좋아하고, 그 글에서 다룬 내용을 가지고 훨씬 풍부한 토론을 할 수 있었다. 그때 느꼈다. 아. 내가 해야되는구나. 누가 시키고 떠먹여주기를 기다리면 안 되는구나...공부가 재밌고 새로운 내용을 알아가는 재미도 중요하지만 여기는 내가 뭐든 하지 않으면 일어나는 일이 없구나...
이를 깨달았을 때 사실 너무 괴로웠다. 내가 만약 뭐든지 날로 먹고 싶다면. 내가 만약 뭐든지 대충 하고 싶다면. 나는 그냥 찍먹만 하고 살고 싶다면. 돈 많은 집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평생 이런저런요런그런 학사 학위들을 따가며 살고 싶다면...그런데 여기는 그런 곳이 아니었네...
어쩌겠는가...나는 여기서 발 빼기는 좀 어려운 상황이 되었으니 후딱 끝내고 나와야지...
그러려면 당장 주어진 과제부터 해결하는 게 좋겠다. 뭐든 러프하게 쓰고 다듬기는 나중에 하자. 비록 그것이 학부생 수준의 레포트라도...어쩌겠는가. 교수님, 저는 공부를 손에서 놓은지 10년이 넘었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