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그렇게 나쁜 마음도 아니면서 장난처럼 토를 달고 싶을 때가 있다.
가령, <이 시험의 과정을 통해 너는 더 성숙해지고 깊어질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
<내가 더 성숙해지고 깊어지는 만큼, 어차피 그다음엔 더 큰 시험과 환란이 올 텐데 성장하여 무엇하느냐.>
그런 이야기들.
나의 자라남은 <내가 원하는 데에 이르기까지>가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데에 이르기까지> 임을 나는 이미 배워 알고 있다. 그것을 위해 때때로 내가 원하지 않는 상황을 겪어야 함도 이미 수용했었다.
주께서 원하신다고 하실 때에, 내 고집으로 No를 하지 않겠다는 건 이미 드린 서원이었고,
언제나 그 약속을 기억하기 때문에, 참으로 삐딱한 고집을 세울 생각은 없다.
그런데도 공연히 토는 한번 달아보는 것이다.
거룩한 것을 소망하는 능력을 잃었기 때문에 들어오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반복되는 시험이나 어려움이 지겹게 느껴지는 기분.
감사로 기꺼이 수용하려는 마음보다는, <이번엔 도대체 이게 언제쯤 끝나나> 재고만 있게 되는 그런 마음.
그래서, 거룩한 것을 더욱 소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기를 위해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소망이 없으니, 이렇게 어딘가 삐딱한 염소 같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런 소망을 구태여 가져야 할 이유를 찾는다면,
어떤 실용적인 이유나 당위보다도, 그저 하나님이 그것을 소망하시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나도 원한다.
하나님이 소망하시면 나도 소망한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단순한 원리에 다다르자 기도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것이 나를 향한 그의 소망이라면, 나도 같은 것을 소망한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