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는 여러 매체를 통해 여러 사람에게 자신을 평가받기 쉽다. 내 주변 사람은 나의 행동을 싫어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 그 안에서도 정도의 차이로 나눌 수 있다. 익명의 매체에서는 양극단이 현실보다 뚜렷해지며, 부정적인 평가에 망연자실하여 자살하는 연예인이나 유튜버들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들도 아마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사람들 신경 쓰지 마. 너는 소중한 존재야" 등의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위로는 위로의 역할을 하지 못했고, 결국 그들은 자신을 잃어버렸다. 설령 그 과정을 결국 견뎌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자신을 잃어버렸다면 그 과정을 긍정하긴 힘들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서 마주할 회의에 겁에 질려 다시 자살을 선택할지 모른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을 다시 찾고, 세상에 많은 세계관이 공유됐으면 한다.
자신을 잃지 않으려면, 자신만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
분명, '나'를 움직이게 하는 건 '나' 밖에 없다. '나' 이외에는 전부 '나'를 설득하는 한 편의 보고서이고, 결재 도장은 결국 내가 찍는다. 이 사실을 데카르트 이후 '나'의 존재 외에는 어떠한 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점에서 필자는 진리에 가깝다고 여긴다. 그리고 자신이 결재 도장을 찍을 때는, 자신만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 즉, 자신만의 세계관(자아)을 구축하는 능동적인 개인이 되어야 한다. 자아가 확고한 사람은 삶의 방향성에 대한 자신만의 진리를 세웠으며, 이 진리는 어떤 타자도 침범할 수 없다. 어떤 지적이고 논리적인 사람들, 대중이 자기 삶에 많은 공격을 퍼부어도 꿋꿋이 지켜내고 자기 뜻을 관철하는 그런 내면의 힘을 가지고 있다. 타자의 행복에서 느껴지는 탐욕스러운 욕심은 거부하고, 대신 진심으로 고무적인 기쁨을 표할 줄 안다. 그렇게 타자의 행복에서도 자신을 지킬 줄 안다.
자아라는 세상은 개미굴과 같다. 개미가 빈 땅에 길을 어디로 낼지 고민하며 길을 뚫다 보면, 어느새 개미굴이라는 큰 세상이 만들어져 있다. 여기서 '길을 어디로 낼지 고민'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의문을 품고, 그 의문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의문에 대해서는 항상 스스로 솔직해야 한다. 그렇게 경험에 대한 감정과 이유를 자문하며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정할 수 있다. 의문은 자아의 이정표와 같다. 이 이정표는 인생 전반에 걸쳐 계속 맞닥뜨리며, 스스로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이정표 앞에서 '자기모순'이 없어야 한다. 자아를 깰 수 있는 주체는 자신뿐이며, 자기모순의 존재는 자신으로 하여금 자아의 근거를 없애게 한다. 하여, 스스로에 의문을 품을 때, 세계관을 붕괴하게 한다. 자아를 확고히 하고 확장하기 위해서는 항상 자기 생각을 말과 행동을 통해 증명하고자 해야 한다. 이 과정은 연역적이기보단, 귀납적이다. 그렇기에 자아를 지키려는 사람은 자아에 모순을 없애고자 항상 노력해야 하며, 이것에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여기서 삶을 살아갈 준비물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정표가 이미 있다는 것은, 자아가 발견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아무것도 없던 곳에 이정표의 답을 따라 길을 개척한다는 점에서 우리 자신은 창조하는 것이다. 즉, 자아는 발견과 창조의 대상이다. 어찌 보면 모순적일 수 있지만, 모순이 아니다. 발견과 발명의 개념이 아니다. 삶이란,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네?' 하면서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임과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에서 그 발견을 다른 세계와 접목하며 다음 자신에 대한 의문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삶이 진행되는 동안 탐구의 여행은 계속되며, 자신을 잃지 않겠다는 것은, 이 여행 동안 자신에게 항상 얽매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이 작업은 용기가 필요하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해줄 것은 이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제, '옳고 그름을 판단할 기준'에 대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들이 존재한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고, 자유주의적 관점 등 다른 시각에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는 많은 기준은 모두 타인이 사회적 합의를 통해 세워둔 기준들이다. 개개인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기준과는 맞지 않을 수 있다. 집단 단위가 아닌, 개인 단위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는, 기준이 오로지 주체의 세계관에 있다. 만약 해당 주체가 스스로 자기모순이 없다면, 그가 하는 행동은 그의 자아 단위에서 '옳다'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어떤 북한인이 북한 수뇌부에 세뇌되어 김정일 일가를 진심으로 은인이고 신처럼 모신다면, 대한민국 집단의 입장에선 '그르다'라고 하겠지만, 필자는 그의 행동을 '옳다'라고 할 것이다. 그의 세계관에 모순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타인의 마음을 직접 확인할 수가 없기에 다른 사람이 자기 행동이 옳지 않냐 물으면 확답을 줄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가 스스로 자기모순이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그의 행동이 '옳다'라고 평가할 수 있다.
가치관에 보편적 정답은 없고, 정답이라고 배우는 것들 역시 어느 집단의 가치관을 대표하는 사회적 합의로 짜인 것뿐이다.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다른 가치관을 '그르다'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타인의 세계관을 붕괴시킬 주체는 그 타인뿐이며, 우리는 그가 스스로 자신의 세계관을 붕괴시키는 중인지에 따라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도 스스로 자기모순이 없다면 누구에게도 파괴되지 않을 수 있으며,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