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으로
낮은 곳으로 - 이정하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이정하의 '낮은 곳으로' 시에서 '낮은 곳'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시각에서 '너'를 바라볼 수 있는 상태이다. 그곳을 원한다는 건, '나'의 가치판단은 충분히 배제한 채, '너'가 자신을 정의하는 방식을 긍정하겠다는 말이다. 상대방이 선하던 악하던, 혹은 똑똑한지 멍청한지 상관없이, 그의 방식을 존중하겠다는 말이다. 또는, 내 기준에 이해가 안 되더라도, 충분히 공감하겠다는 말이다. '너'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그럴 수 있지"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청자의 편협적인 가치판단에 부합하는 이야기에만 공감하는 것이 아닌, 궁극적인 의미의 '공감'이다. 전자는 오히려 공감이라기 보단, '합리성 판단'에 가깝다. 또, 이는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의 구절이 의미하는 인생의 하향곡선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낮은 곳'이란 어떤 곳이길래 자신의 모든 걸 버려도 긍정할 수 있는 것일까. 이 글에서는 화자가 말하는 '잠겨 죽어도 좋으니'의 의미를 확장해 보았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두려움을 갖고 있다. 누구는 거지가 되기 싫어하고, 누구는 가족을 잃기 싫어한다. 안정감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고, 그런 미래에 대한 불안은 많은 선택의 순간에 머릿속에서 무서운 선생님이 되어 스스로를 가르친다. 그리고 선택 후에는 오늘도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자기규율(self-discipline)의 권위를 서서히 강화하고, 이는 반복되면 지혜의 지위로까지 격상된다. 그렇게, 없애기 힘든, 경험에 기초한 관성이 생긴다. "성공하려면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된다.", "번아웃이 오지 않기 위해 매일 운동을 해야 한다."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길들여지면, 개인은 인생의 상향곡선에서 안정감과 기대감을 경험하는데, 이 감정은 하향곡선에서 느껴질 공포를 극대화하고, 저 밑바닥의 형편없을 자신을 쳐다보지 않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부', '번영', '명예' 등에 대한 키워드에는 긍정을, '가난', '몰락', '무시'에는 부정을 표하게 된다. 이는 범사회적으로 답안으로 제시되며, 가난과 몰락을 사탄으로 묘사하는 등 많은 예술 작품에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게 사회와 개인은 그 밑바닥이 가지는 의미는 무시한 채, 판도라의 상자 안의 희망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누구나 밑바닥은 경험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희망을 볼 줄도 알아야 한다. 이 희망에 대한 단서를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의 다음 말에서 얻을 수 있다.
"당신이 가장 찾고 싶은 것은 당신이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곳에서 발견될 것이다."
가령, 조던 피터슨이 보기에, 우호적인 사람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분노와 갈등이 유발되는 상황을 맞닥뜨려야 한다. 또, 어떤 심리학적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정말로 가야 할 곳은 그 두려움을 정면으로 마주할 공간이다. 이는 황금을 찾기 위해 용(dragon)과 마주해야 하는 오래된 이야기와 흡사하다. 주인공은 금을 얻기 위해 용의 소굴로 가야 하고, 용은 당장이라도 주인공을 불태워 죽일 것이다. 이 이야기는 개인과 현실 사이의 역설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쉽사리 원하는 것을 내어주지 않는 현실. 그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문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인간. 조던 피터슨은 여기에, 원하는 게 하필 힘들었던 것의 결과인 게 아니라, 힘들었기에 가치 있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고 전한다. 즉, 용과 금의 관계에서 비유하면, 금이 가치 있기에 용을 무찔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용을 무찔러야 얻을 수 있기에 금이 가치 있다는 것이다.
이제, 판도라의 상자 안의 희망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 우리는 되기 싫은 모습이 참 많다. 팔이 잘려 불구로 살기 싫고, 거지가 되기 싫다. 이 모습들이 싫은 이유는 공통적으로, 개인이 각기 정한 '성공의 표준'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겪지 않고 싶던 모습을 직면했을 때, 나아가, 그 모습을 현실로 겸허히 받아들일 때, 그 표준은 유효하지 않다. 그 모습은 더 이상 두려운 모습이 되지 않는다. 삶의 밑바닥에서 떨어질 곳은 없다는 안녕과, 두려운 것이 없어진 데에서 오는 소름 끼칠 정도의 낙관을 느낀다. 추락하는 과정이 새로운 국면의 시작인 것이다. 그렇기에 인생의 하향곡선은 아름다우며, 이것이 판도라의 상자 안의 희망이다. 그리고 이 맥락에서, 이정하의 '낮은 곳으로' 시의 '낮은 곳'과 '나를 비우겠다'는 표현은 각각 '인생의 밑바닥'과 '인생의 하향곡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너'는 저 아래에서 느낄 높은 수준의 안녕과 낙관을 뜻하며, 결론적으로,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라는 표현은, '두려움의 실체에 깔려 죽어도 좋으니 그 끝의 희망을 마주하겠다'라는 선언과도 같다.
온 우주가 나를 심해 속으로 끌고 가려할 때, 나는 심하게 발버둥 칠 것이다. 내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닌, 내 원초적 본능에 의한 반응이다. 스스로 관성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관성을 거스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충분히 저항해 보자. 그리고 만약 나를 당기는 힘이 내가 지탱하는 힘보다 커지면, 겸허히 받아들이자. 롤러코스터를 타 듯, 하향곡선에서 느껴지는 우울감과 박탈감, 소외감을 만끽하자. 마음의 평안은 어쩌면 그곳에 있다. 그러니, 대인관계에서의 실패, 부모의 죽음, 입시 실패의 경험을 부정하며 매듭짓지 말자. 어디든지 그곳이 바닥이라고 느껴진다면, 거기서 희망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