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어린 아이가 될 순 없을까.
단순하던 세상.
내일에 대한 걱정이 없던 밤.
가장 몰입할 수 있었던 순간..
초등학생 시절, 등교 후 집의 문이 잠겨 있어서 집에 못 들어간 때를 기억한다. 아빠는 일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 있어서 집에 잘 안 오던 시절이다. 엄마는 외출할 때면 문 아래 우유 넣는 구멍에 열쇠를 숨겨 놓았는데, 가끔은 까먹을 때가 있었다. 그래서 종종 방과 후에 현관문 앞에서 엄마를 기다리곤 했다. 그리고 그 날도 익숙하게 문 앞에서 멍 때리며 엄마를 기다렸다. 하지만 왜일까. 엄마는 저녁이 돼도 오지 않았고, 감정은 지루함에서 불안함으로 바뀐지 오래이다. 너무 불안한 마음에, 그냥 울면서 윗층 친구네 집에 무작정 벨을 눌렀고, 친구와 친구네 엄마는 놀라며 나를 집으로 들였다. 정확히 기억도 안 나고, 그냥 그 두 명 앞에서 계속 울면서 엄마가 안 온다고 한 기억 밖에 없다 (그리고 안정시켜주신다고 바나나로 만든 음식을 주셨는데, 이런 음식도 있네 하며 신기했던 기억 정도). 친구 집에 있다가 결국 엄마가 오고, 집에 들어가는 싱거운 엔딩이지만, 그때 느낀 불안은 지금에 와서도 신선한 충격이다.
그때의 나를 잃고 싶지 않다. 그때의 나는 존재하는가? 기억을 간직하는 나도 어린 아이인가. 내 안에 남아 있는 어린 아이, 그는 어떤 존재였지. 그는 분명 내 안에 연약함으로 남아 마음 한 켠에 공허를 만든다. 이제는 감정과 기억으로 남아 있는 순간들. 바뀌지 않는, 열람만 가능한 잔상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주인공. 나는 탈출했지만, 기억 속 세계는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간 이야기. 그 끝에선 나만 남고 공허만 쌓인다. 그리고 공허 끝에선, 다시 되돌아 가고자 하는 욕구를 느낀다. 다시 몰입할 세계를 만들고, 그 안의 주인공이 되고자 한다. 내 맘대로 만드는, 내가 가장 잘 아는 세계. 어린 아이의 창조 본능으로 다시 세계관을 만들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그때의 나를 잃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 완벽한 타인을 찾는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완벽한 타인이 될, 그런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완벽한 타인이란, 본인의 가치판단은 접어두고, 상대방의 세계를 인정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요구하지 않으며, 자신의 세계관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 '타인'이며, 타인의 역할을 잘 수행하며 상대를 극단적으로 긍정한다는 점에서 완벽하다. 서로의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며, 해석하되, 판단하려 하지 않는다. 신분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며, 그 자체를 볼 수 있는 존재이다. 잘못이 있거나, 흠이 있어도 용서하고 그의 의견을 긍정할 수 있다.
서로의 세계를 긍정하고 흥미로워 하는 완벽한 타인과는 몰입된 세계를 구축하고 되돌아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내가 더 어린 모습을 잃기 전에, 조금이라도 어린 모습을 그 사람의 눈동자에 간직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을 빨리 만나고 싶다.
그래,
내가 다시 어린 아이가 되겠다는 것은
너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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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데에는 대게 이유가 있다.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무의식 속에 근거가 존재한다. 이유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믿기도 한다. 이유가 있으면, 감정에 정당성을 부여해 그 감정이 어디에도 모순되지 않음을 확인한다. 본능적으로 모순 없는 사고를 지향하는 인간은 정답을 찾았다며, 자신이 채택한 논리 체계 안에서 안정감이라는 보상을 받는다. 이유는 더 뚜렷해지며, 감정을 강화하게 된다. 그렇게, 특별한 관계를 형성한다. 하지만, 감정은 하나의 인과관계로 구성되지 않으며, 반대되는 감정에 대한 근거도 항상 잠재한다. 가령, “네가 똑똑해서 좋아”라고 한다면, 이 말은 다음을 암묵적으로 가정한다. “너의 사고 체계가 나의 것과 비슷하고, 껌을 바닥에 뱉지 않을 정도의 도덕이 탑재되어 있으며, 사람들에게 적당하게나마 신용을 받는 사회인이라서 싫지 않아”. 이 가정은 언제라도 ‘싫다’라는 감정의 근거가 될 수 있으며, 발현이 안 됐을 뿐이다. 즉, 이유를 들어 감정을 설명하는 것은 굉장히 ‘조건적’인 접근이다. 가까이 있지만, 조건을 초월한 관계를 지향하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 관계가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조건적이지 않은 관계는 주변에 많이 존재한다. 가령, 동물은 내가 사회에서 범죄자인지 위인인지 상관없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똑같다. 내 처지는 그들의 관심 밖이며, 그들의 이해 영역도 아니다. 또, 타인과 나의 관계도 무조건적이다. 예를 들면, 케냐에 사는 38세 어린이집 원장 알렉스 씨는 애초에 나에게 관심이 없다. 나 또한 그에게 관심이 없으며, 그렇기에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더라도 무조건적이다. 다만, 동물과 타인 모두 완전한 무조건적 관계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반려동물은 내가 해치려 하거나, 밥을 안 주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차가워질 것이다. 타인의 경우도, 완전한 타인이 아닌 횡단보도에서 만난 사람과 같이 ‘적당한 타인’인 경우, 내가 전자 발찌를 차고 있다면 은연중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본인과 연고가 아예 없는 사람도 수동적 무조건이지, 능동적 무조건적 관계가 아니다. 이렇듯, 타인, 동물과 나의 관계는 전반적으로 무조건적이지만, 완벽하지 않다. 주변을 넘어, 김수환 추기경, 언더우드 선교사, 나이팅게일과 같은 선인과의 관계도 무조건적일지는 모르는 것이다. 내가 악마와 같이 그들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존재를 부정해도, 그들은 날 계속 긍정할 수 있을까.
능동적 무조건적인 관계가 되겠다는 것은, ‘완벽한 타인’이 된다는 것이다. 감정은 가지지만, 완벽하게 아무것도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기대하는 것이 전혀 없는 타인이 되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의 입지가 어떤지, 그들이 나에게 무얼 하고 원하는지 상관없이, 그들을 대하는 스탠스에 변함이 없게 된다. 그 타인이 누군가를 무조건적으로 긍정할 때는, 자신의 가치판단은 접어두고, 옳지 않아 보이는 전과자라도 응원해 줄 수 있다. 설령 그가 자신을 해치려 하거나, 스스로 지옥에 가겠다는 선택을 해도 그의 선택이기에 걱정을 이기고 긍정해 줄 수 있다. 성경 속 예수의 모습과 유사하게, 죄인이라도 용서할 수 있으며, 자신에게 악심을 품는다면, 기꺼이 받아줄 수 있다. 다만, 예수는 죄인이 피해자에게 용서를 먼저 구하고 죄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용서해 준다는 점에서 조건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완벽한 타인’은 그것을 초월하여 긍정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탈 인간적인 면모의 인간상을 상상하는 것이 의미나 있는 것일까. 불가능하다면, 괴리감만 커지는 것은 아닐까.
한 개인이 ‘완벽한 타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자비를 통해 가능하다. 상대방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하기 힘든 이유는, 내가 해석하는 세계의 논리 체계, 가치 체계가 상대방의 것과 같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출발한다. 가령, 어린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물건을 공유하기 힘들고,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가져가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소유’의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성인과는 다르게 어린아이에게는 이 개념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자비를 베풀기 쉽다. 타인과의 대화에서도, “내 세계관의 해석과는 맞지 않지만, 너의 세계관에서는 맞을 수도 있겠다.” 하며 자비를 베풀 수 있다. 내 생각과는 별개로 상대방은 그의 세계관에서 충분히 합리적일 것이다. 이 관점에서, 내 세계관이 더 우월한 것이며,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생각한다 등의 논리는 가스라이팅의 일종이며, 익숙해진다면 ‘완벽한 타인’과는 거리가 멀어질 것이다.
내가 내 세계관을 고집하는 일을 멈추고, 누군가에게 완벽한 타인이 될 때, 대상을 선택함에 있어서는 직관과 감정에 의한 결과일 것이다.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며, 이유를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완벽한 타인이 될 수 없다. 표현할 수 없는 이유에 큰 책임을 갖겠다는 건 비합리까지 합리의 영역으로 포용하겠다는 것과 같다. 즉, 기존의 세계관에서는 비합리적인 일이지만, 새로운 세계관에서는 합리적일 것이다. 아예 새로운 세계관에 대한 기대는 어린 시절 메이플스토리에서 새로운 맵을 탐험할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그렇기에 어릴 때의 순수한 마음과 끈기로,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