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고요]
10월, 학원 알바로 지친 나를 찾아온 건 날 짓누르는 여러 압박이었다. 산 넘어 산. 작은 일이라고 치부하기엔 나에게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찾아왔고, 멘탈이 나가기 직전, 아니 멘탈이 나가있던 상태였다.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사람에게 많은 일이 쏟아진다면 할 수 있는 것은 '회피'다. 그렇게 난 회피를 선택했다.
덜컥 목포에 있는 한 숙소를 예약했다. 숙소 값과 교통비까지 약 25만 원. 이사와 생활비 등 경제적 상황을 걱정하던 내가 나를 위해 25만 원을 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새벽 내내 손은 덜덜 떨리고 과하게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애써서 잠을 청해야 했다. 두려움이 너무 컸던 것 같다. 이렇게 여행을 가도 되는지, 회피를 해도 괜찮은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래도 가고 싶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을 온전히 포기했을 테니까.
221012
몇 시간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다 일어나서 잠시 생각했다. 내가 혹시 꿈을 꿨나? 멍하게 앉아있다 서둘러 짐을 챙겨 나왔다. 아침의 공기는 참 차가웠다. 잠수를 탈 것이니 연락해도 안 받겠다는 스토리만 달랑 올린 채 기차에 탑승했다. 이번 여행을 알리는 버저였다. 누구의 방해 없이 나 혼자 하는 여행이 되어야지.
목포까지는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가는 동안 드라마를 보려고 전 날 열심히 찾아놨었다. 하지만 잠을 설친 탓에 버텨보다 결국 내리 잤다. 열심히 드라마를 찾아놓은 시간과 노력이 아까웠지만 괜찮다. 그래도 되는 여행이다.
기차에서 피곤하게 잠을 잔 탓에 컨디션이 좋지는 않았다. 밥을 얼른 먹고 숙소로 출발했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있던 숙소는 급하게 예약했음에도 참 마음에 들었다. 주변도 조용하니 나에게 딱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이북 리더기를 꺼내 들었다. 이번 여행과 함께한 책은 고요 작가의 [나는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위로와 응원을 담은 흔한 에세이보다 그냥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겪은 일은 다르더라도 누군가와 같은 마음을 느끼고 싶었다.
한참을 읽다 바다 앞에서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간단한 짐을 챙겼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이번 여행이 참 좋은 기억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날씨, 마음에 드는 숙소, 원하는 책.. 굉장하지 않아도 꽤 행복한 여행일 것 같았다. 예감이 좋았다.
커피를 한 잔 사서 바다를 바라보며 앉았다. 해변이 없던 바다라 오히려 잘 되었지. 나무로 된 큰 계단에 앉아 한참 바다를 보며 멍 때렸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금방 숙소로 돌아가야지 생각했는데, 바다를 보다 보니 잔잔하게 흘러가는 풍경을, 또 해가 지며 바뀌어가는 바다의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남서쪽에서 보고 있으니 하늘과 바다 모두 얼마나 예쁠까.
해가 지기까지 1시간가량 시간이 남아 이북 리더기를 다시 꺼내 들었다. 작가는 책 속에서 그의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낸다. 이래라저래라 하는 말도 없었다. 그래서 더 좋았던 책이었다. 나를 함부로 위로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이 책이 나 스스로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것일지 모르겠다.
"추구하는 이상적인 모습은 기형적으로 커져만 갔고, 그 위엔 부족하고 모자란 나를 무섭게 비난하는 또 다른 나만 남았다. 다들 아픈데도 밝게 웃으며 잘 견뎌내는 거구나, 그렇다면 이렇게 힘든 이유는 내가 부족하고 약해서겠지. 그냥 조금 유난스레 사춘기를 겪는 아이가 되기로 했다. 아파하는 날 타박하며."
바다를 보다 책을 읽고, 책을 읽다 해가 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계속 울컥했다. 그러다 그냥 울어버렸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당황하며 떠나더라도 소리 내어 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책은 그저 내 울음의 도구였던 것 같다. 어떤 것도 하지 못한 채 버티고 있었던 내가 얼마 만에 우는 건지.
한참 울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슬프거나 힘들진 않았다. 할 일을 다 한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숙소로 돌아왔다. 물론 뇌에 쥐가 나듯 머리가 띵하고 입맛이 없었지만 평소와 다른 날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울고 왔음에도 이렇게 편한 날이 얼마 만인지.. 꽤나 생소한 감정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당황스러웠다. 내 마음대로, 또 계획과는 다른 날이었더라도 만족스러웠던 날이 얼마 만이지?
221013
자고 일어나니 어느덧 11시. 오늘은 가고 싶었던 달성사에 꼭 가야지. 후다닥 씻고 일어나 미리 찾아놓은 맛집으로 향했다. 아차차, 지금 점심시간이지. 사람들이 아주 바글바글.. 내 자리는 없다. 편의점에서 라면이나 먹을까. 저녁에 또 입맛 없어서 대충 먹을 것 같은데, 어쩌지. 우왕좌왕하는 중에 보이는 [김밥나라].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분명 국물을 먹고 싶어서 곰탕집을 찾았는데 김밥천국도 아닌 김밥나라에서 돈가스를 시켰다. 자연스러우면서도 멋대로인 흐름이 나를 웃게 했다.
유달산에 가기 전, 카페에 들러 커피를 샀다. 아아를 챙겨 들고 케이팝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부지런히, 휘적휘적 유달산으로 향했다. 발걸음은 가벼웠다.
유달산 둘레길(약 5km). 나는 유달산 입구 지도를 보며 눈을 비볐다. 네이버 지도는 어제 분명 둘레길이 2km랬는데 분명히. 간단한 산책이라며.. 지금 지도를 보면 사실 2km 일 수 없는 거리다. 기분 좋음에 취해 착각했나.
그래도 시간이 많은 나는 걸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트레이닝 복과 러닝화를 착용한 채라 부담이 없었고 정 힘들면 중간에 포기하고 하산할 수 있는 지점들이 많았다. 결정적으로 여행 중이라고 운동하는 것 빼먹고 싶지 않았다.
이북 리더기, 필름 카메라, 바셀린, 아아, 젤리 등 둘레길을 걷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지만 어디서 자꾸 자신감이 나왔는지.. 그대로 출발했다.
걷기 시작하고 딱 5분 만에 알았다. 아 나는 이 길을 끝까지 걷겠구나. 내가 여기에 온 이유가 있구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적당히 따뜻했던 햇빛, 그 빛을 받아내던 초록빛 나무들, 멀리 보이던 바다의 반짝이는 윤슬까지. 잎끼리 부딪히는 소리, 멀리서 누군가 이야기하는 소리.. 걷는 내내 나는 모든 것을 담고 느꼈다. 내 감각을 이렇게까지 자극한 적이 있었나. 모든 걸 닫아놓고 살았는데 오랜만에 느껴보는 생소함이다.
많지는 않았지만 나를 스쳐 지나가던 사람들, 유달산 둘레길의 이정표들.. 모두 반가웠다. 나무 판때기 하나가, 누군가의 존재가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며 안심시켜주기까지 했다. 이렇게 작은 것 하나도 큰 힘과 확신이 될 수 있구나.
이 산을 선택한 나 자신을 칭찬했다.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 주어서, 이로써 나는 또 살아낼 힘을 얻어 갈 것이기에 고마웠다.
곧 나는 달성사에 도착했다. 큰 절은 아니었지만 잠시 들러 쉴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쉬고 싶은 만큼 쉬고, 하고 싶은 만큼 기도했다.
둘레길 중간중간에 있던 돌탑들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적당한 돌을 찾아 돌탑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신이 누군가 쌓아놓은 간절함에 감동하여 그들을 돌보실 때, 살짝 얹어놓은 내 기도도 함께 덤으로 봐주시지 않을까 하고. 나를 좀 잘 봐달라고,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다고, 도와달라고. 수십 번 빌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김만기 미술관에서 서양화 작품들을 감상했다. 외관이 참 예뻤던 근대역사관 앞에서는 벤치에 앉아 그림을 그리던 아주머니도 만났다. 곳곳에서 즐거움을 마주했다. 완벽하는 흘러가는 하루에 계속해서 감사함을 느꼈다.
다시 바다를 향해 걸었다. 역사관에서 20분 정도 더 가다 보니 여객터미널이 나왔고 그 바닷길을 쭉 따라 걸었다. 지금 고백하자면 터미널 바로 옆쪽의 바다는.. 조폭들이 패싸움을 하거나 살인 혹은 누굴 잡아두고 고문하는 ..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분위기였다. 안전한(?) 장소가 나올 때까지 열심히 걸었다.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잠시 전화라도 해볼까 고민됐던 유일한 순간.
그럼에도 존버는 성공한다. 걷는 중에도 한참 버스를 타 갓바위로 향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내가 딱 원하던 바다가 나타났다. 치밀하도록 내 SNS 생활을 분석하는 알고리즘보다 더 소름..
마침 해가 천천히 지고 있었고, 전날 본 바다보다 서쪽에 있는 곳이라 그런지 해를 더 오래 볼 수 있었다. 한참을 또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는지 무척 수다스러운 갈매기, 큰 돌에 금방 부서지던 파도들, 가까이서 바라보면 바닥이 다 보이던 맑은 물결 위에 짙은 색으로 채색되던 윤슬.. 참 화려하고 고요했다.
나는 벤치에 제대로 자리 잡고 앉아 책의 뒷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살짝 추웠던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후드도 뒤집어쓰고.
작가는 우울증을 버텨낼 힘을 얻고자 떠난 세계여행에서 큰 사고를 당한다. 함께 여행한 친구를 영영 잃었고,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친구 옆에서 팔 한쪽이 잘려나간 채로 며칠을 버스에 깔려 살기를 간절히 바랐다.
"얼마나 많은 행운과 기적이 겹치고 또 겹쳐야 평범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건지, 이미 엄청난 확률의 기적 속에 살고 있다는 걸 죽음과 마주 보기 전까진 몰랐지. 고마워. 미안해. 죽음 앞에 남은 건 이 두 개가 전부였다. 날 사랑해 준 모든 사람이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 외에 다른 것들은 죽음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버티면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우울증과 버스 사고는 같은 선상에 있었다. 고통의 정도는? 비슷했다. 온몸이 구겨진 채 깔려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엄청난 짓눌림의 고통 속에 있었다. 극심한 우울증으로 침대 위에서 몸부림칠 때의 고통과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았다. 십수 년 만에 처음으로 나의 아픔을 알아준 시간, 진실로 아픔에 공감해 준 최초의 시간이었다. 난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픈 사람이었을 뿐."
나는 그동안 내 우울증 고통의 정도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정도를 생각하기보다 참아내고 극복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그것이 나를 돌보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이 글들을 읽으면서 그동안 무뎌져온 내 상태를 처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만큼 아팠을 수도 있겠다. 날 잡아먹을 듯 어둠으로 뒤덮인 바다보다, 나를 바라보던 그 순간이 더 무서웠다.
나는 책을 읽다 말고 또다시 한참을 울었다. 그러다 미친 사람처럼 바다를 향해 소리를 내지르기도 했다. 살면서 내보지 않았던 비명을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크게 질렀고,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말들을 꺼냈다. 제발 살려달라고, 도와달라는 말들이 어둠 사이로 흩어졌다. 내 말을 삼켜내는 바다를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속 시원함을 느꼈다.
어지러운 머리를 붙들고 겨우 숙소로 향했다. 버스를 탄 나는 30분 내내 푹 잤다.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돌아왔다. 절대 잊지 않았으면 해서, 또 힘들었을 때가 찾아왔을 때 꺼내볼 수 있었으면 해서 오늘을 천천히 곱씹었다.
돌아오는 길
역시 사람 하나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현실을 회피해 도망온 나, 그런 나를 한심하다며 몰아세우는 또 다른 나에게 잠식되어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그럼에도 여러 자극을 받아내며 현재에 집중하고 '내 생각'을 가장 많이 한 여행이었음에 감사했다. 또, 아픔을 인정하고 나를 돌보는 일을 더 이상 미루지는 않았음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난 내가 우울한 것인지, 내가 날 더 우울하게 만드는 것인지 내 상태가 명확하게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한다. 매번 증상도, 몸의 상태도 빠르게 바뀐다. 그럼에도 감정에 완전히 빠져있는 나를 조금이라도 멀리서 바라보는 방법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나를 인정하고 새롭게 알아가는, 또 과거의 나를 깨버리는 여행일 수 있었던 것은 책의 공이 크다. 작가는 이야기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이야기밖에 없어요. 해결책을 제공해 줄 수도 없고, 기가 막힌 통찰을 건네줄 수도 없어요. 다만 기도할 뿐입니다. 나의 오랜 치유의 여정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귀한 이야기가 되기를, 한 명이라도 좋으니 꼭 필요한 이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여행이 끝나고 내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욕구가 굉장히 커졌다. 천천히 하나씩,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꺼내놓고 싶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이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