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너머 이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메시지
‘뱀파이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인간의 피를 양식으로 살아가는 어둠의 존재, 공포스러운 괴물, 또는 매혹적인 옴므파탈, 팜므파탈. 이렇듯 뱀파이어는 수없이 많은 문화예술 분야에서 꾸준히 재창조, 재해석되며 그 역사를 이어왔다. 아마 대중적으로 가장 알려진 뱀파이어는 브램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의 드라큘라 백작일 것이다. 그러나 스토커의 ‘드라큘라' 이전에, 매혹적인 뱀파이어 소녀 ‘카르밀라'가 있었다.
지난 6월 11일 첫 선을 보인 뮤지컬 <카르밀라>는 1872년 발표된 레 퍼뉴의 고딕 소설 <카르밀라>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극으로, 매혹적인 뱀파이어 소녀 ‘카르밀라’와 순수한 인간 소녀 ‘로라'의 아름답고도 위험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카르밀라>는 뱀파이어가 한낮에도 돌아다닐 수 있다는 등 소설의 기본적인 설정을 차용하면서도 다양한 영역에서 각색이 이루어져 소설과는 차별화되는 뮤지컬만의 서사를 속도감 있게 끌고 간다. 특히, 원작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인 ‘닉'과 ‘슈필스도르프 부제'가 추가하여 박진감 넘치 플롯을 구성하는 한편, 카르밀라와 로라의 과거 서사를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소설에서는 모호했던 이 둘의 관계를 재정립한다.
소설 속 카르밀라는 오랜 세월 동안 살아남아 이름을 바꿔가며 숱한 소녀들에게 친구로 접근해 이들의 피를 흡혈하는 악마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다만 로라에 대해서만은 흡혈에 죄책감을 느끼며 내적갈등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 카르밀라만이 뱀파이어로 등장하는 소설과는 달리, 뮤지컬 <카르밀라>에서는 평범한 인간 소녀였던 카르밀라를 사랑해 그녀를 뱀파이어로 만든 또 다른 뱀파이어 ‘닉'이 등장한다. 500년이라는 세월을 뱀파이어로 살며 흡혈에 익숙해진 그녀는 인간의 피를 먹는 행위에 대해, 그들을 해치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도 죄책감도 가지지 않는다. 반면 카르밀라는 인간의 피를 갈구하는 스스로에 대해, 뱀파이어라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깊은 염증을 느낀다.
뮤지컬 <카르밀라>는 소설 속 ‘카르밀라'가 가진 뱀파이어로서의 악마적인 면모와 로라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지는 인간적인 면모를 분리해 각각 닉과 카르밀라라는 인물로 발전시킨 듯 보인다. 인간을 해치는 한편 자신이 사랑하는 카르밀라에게 강하게 집착하는 닉은 뱀파이어인 카르밀라가
또한 카르밀라를 무찌르는 데 앞장서는 소설 속 인물 ‘슈필스도르프 장군'은 뮤지컬에서는 카르밀라와 합심해 닉으로부터 로라를 지키는 ‘슈필스도르프 부제'로 각색되었다. 원작에서 뱀파이어를 배격하고 몰아내는 인물이었던 슈필스도르프가 뮤지컬에서는 악한 뱀파이어를 몰아내면서도(닉) 뱀파이어가 된 로라와 카르밀라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준다는 점이 매우 아이러니하다.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로 결말이자 새로운 시작을 맞은 로라와 카르밀라가 앞으로의 삶에서 지치지 않고 행복했을지는 미지수이다. 카르밀라와 함께 하기 위해 자신의 피를 내주고 스스로 뱀파이어가 되겠다는 선택을 내린 로라이지만, 언젠가 피를 탐해야만 하는 자신의 존재적 숙명을 미워하게 될지 모른다. 그토록 사랑하고 지켜내고자 했던 로라와 결국 함께하게 된 카르밀라도 같은 고민을 하며 다시 괴로워하게 될 수도 있다. 극적으로 닉의 집착에서 벗어난 카르밀라가 로라의 집착에 다시금 속박된 것만 같은 느낌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게 영원히 함께하기를 선택했다. 이들이 정말 영원히 사랑하며 행복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로를 선택한 그 순간만큼은 영원할 것 같은 충만한 사랑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영원한 사랑'을 뜻하는 히아신스 꽃밭에서 그들이 나눈 맹세는 ‘영원한 사랑’의 실제 존재 여부와는 관계 없이, 서로를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다짐이자 영원히 사랑하고 싶다는 다짐에 가까웠다. 어쩌면 영원한 사랑은 실제로 영원히 사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앞으로의 길에 장밋빛 미래가 아닌 잿빛 폭풍우가 몰아치더라도, 어떤 역경과 고난도 함께하겠다는 결심, 그 어떤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용기가 영원과 같은 순간으로 가득한 사랑을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카르밀라는 경계 밖의 인물이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인간이 아닌 존재. 흡혈을 통해 살아가야만 하는 본능 때문에 그녀는 늘 핍박받는 비난과 공포의 대상이었고, 그런 자신을 스스로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러나 로라는 그녀에게서 아름다움과 순수함을 보았고, 먼저 손을 내밀어 친구가 될 것을 제안한다.
본질적으로 뱀파이어와 인간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들은 경계선을 사이에 둔 너무나도 다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사랑을 위해, 서로를 위해, 끝내 함께하기 위해 금단과도 같은 경계선을 넘는다. 죽음에서 삶으로, 인간에서 뱀파이어로. 로라의 피로 다시 살아난 카르밀라와 뱀파이어가 된 로라는 서로의 손을 잡고 새로운 여정을 떠난다.
이들을 향해 슈필스도르프는 살아있는 모든 것에 축복을 내려달라 기도한다. 소설 속에서 경계 너머의 뱀파이어를 배척하던 ‘슈필스도르프’는 이제 성직자로 뮤지컬 무대에 서 경계 너머의 이들에 대한 축복과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다.
뱀파이어와 인간, 혹은 그 어떤 경계선을 사이에 둔 채 그 너머로 밀려나 소외된 이들, 그들 모두에게 사랑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아트인사이트 기고글 원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0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