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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이 두 번

엄마는 내 생일을 항상 음력으로 쇤다. 음력 2월 마지막날에 태어나 기억하기도 좋다고 했다. 음력 2월 29일이라 생일이 없는 해도 있지만, 음력 2월 마지막날은 항상 내 생일이다. 어릴 적 생일날에 생일 케이크는 없었지만 아침이면 부엌 가스레인지 위에 항상 막 끓인 미역국이 있었다. 새벽 일찍 논으로 나가기 전 엄마가 쌀 뜬 물에 소고기 잔뜩 들어간 미역국을 끓인 것이다. 


내 또래 친구들은 생일이면 생일 케이크에 생일 선물 잔치를 하는데 나에게 생일 선물이란 소고기 미역국뿐이었다. 그래서 난 깨달았다. 아무도 내 생일을 축하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엄마의 미역국이 어린 나에겐 생일 선물 축에도 끼지 않았다. 결국 나도 내 생일을 잊어버리고 살게 되었다.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는 생일, 기억해서 뭐 해."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으면서 알았다. 나의 공식 생일은 음력 2월 (양력 3월)이 아닌 양력 7월이란 것을 말이다. 4개월 동안 아부지는 면사무소에 나의 출생을 신고하지 않았다. 농촌에서 농사꾼에게 봄은 한참 일손이 모자라는 시기다. 한창 바빠질 무렵에 태어났으니 벼 씨 뿌리고 밭에 콩 심느라 부모님 모두 겨를이 없었을 테다. 계절이 바뀌어 여름이 될 시점에 아직 죽지 않고 기운차게 노다니는 막내딸을 보면서 아부지는 느꼈다. 

오메, 저것이 아직도 살아있네. 내일 하정산 아랫 논 돌아보고 면사무소 들려야 겄다.

어느 날 유튜브를 보는데 부모님이 자신이 딸이라고 1년 동안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며 눈물 흘리는 유튜버를 봤다. 출생신고는 비록 한낱 문서에 불과하지만, 출생을 1년이나 공식화하지 않았다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어떻게 여겼는지 그대로 드러내준다. 이 유튜버와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4개월 동안 나의 존재가 한국 정부 문서에서 사라져 있었다는 사실에 나도 슬퍼했다. 


40년 넘게 이 사실이 슬픈 것인 줄 모르고 살았다. 생일이 별 의미 없는 사람이었기에 4개월 동안 부모가 나를 잊고 살았다는 것도 별 의미가 없었다. 


어릴 적 난 툭하면 울었다. 내가 울 때면 아부지는 나를 달래주기보다는 오히려 울음보를 더 크게 터뜨렸다.

"너 니 엄마한테 가라. 저 앞다리에서 주서 왔더니 애가 말은 드럽게도 안 듣네."

집 앞에는 작은 실개천이 흐르는데 이 위로 다리가 하나 있다. 아부지가 말하는 앞다리는 바로 이 다리를 말했다.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소리에 크게 놓아 울었다. 그러면 옆에 있던 엄마와 언니들은 나를 달래주기는 커녕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웃음보를 터뜨렸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고 3학년때까지 언니가 알려주기 전까지 정말 아부지 말대로 다리 밑에서 주서온 자식인 줄 알았다. 자식이 아니라서 내가 제일 못생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야, 아부지가 말하는 다리는 엄마 다리를 말하는 거야."


처음에는 언니 말이 믿기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아부지 말 대로 내 친엄마를 찾아서 집을 떠나야 하는 건지 걱정이 한가득이었기 때문이다.


결혼 후 남편과 남편 부모님은 내 생일을 일 년에 두 번 차려준다. 내가 진짜로 태어난 날과 한국 정부 문서에 올라간 나의 공식 생일. 생일이면 같이 외식도 하고 생일선물도 주신다. 남편한테서 하나, 시부모님한테서 하나, 그래서 한번 생일을 맞을 때마다 선물도 두 개다. 처음에는 부끄러웠다. 나 자신도 신경 쓰지 않는 생일을 남이 챙겨주니 너무 어색했고 그런 생일 축하를 받기가 싫었다. 생일은 일 년에 한 번만 챙겨줘도 감사하다며 굳이 두 번이나 챙겨줄 필요 없다고 남편과 시부모님께 진심을 다해 이야기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생일 축하 사랑을 이렇게 받다보니 지금은 내생일에도 "쪼끔"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남편과 시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두 배의 생일 축하가 그동안 무감각하게 지냈던 나의 생일을 커버하고도 남았다. 


일요일 아침, 바쁘게 챙겨서 교회로 향한다. 조수석에 앉아서 안전벨트를 매고 남편이 시동 걸고 운전하길 기다리고 있는데 남편은 날 유심히 바라보며 묻는다.

"너 뭐 잊어버린 거 없어?"


지금 바로 출발해도 제시간에 교회에 도착하기는 이미 늦었는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잊은 거 없어. 빨리 출발하기나 해!"


교회는 물론 늦게 도착했다. 교회 예배가 모두 끝나고 사회자가 마지막으로 말한다.

"이번주 생일자는 ㅇㅇ입니다. 우리 모두 마지막 기도 끝나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릅시다."

그때야 알았다. 오늘이 남편 생일임을...


과거의 나였다면 남편 생일을 잊어버린 것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것이다. 내 생일도 의미없는 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어붙은 나의 마음이 그동안 받았던 생일 축하로 슬금슬금 녹기 시작하면서 남편 생일을 잊어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을 쪼금 느끼기 시작했다.


교회를 나오면서 남편에게 말을 건넨다.

"미안해"

"괜찮아. 내가 미리 말해주지 않아서 미안해. 아침에 내가 너 뭐 잊어버린거 없냐고 물었을때 알줄 알았지. 내가 너무 삥 둘러서 얘기 했네."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고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항상 부러워 하면서 커왔다. '너 니까 사랑해'라는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 나도 나 자신을 조금씩 사랑하기 시작했다. 


"넌 행복을 두려워해."

남편 말이 맞다. 지난 40여년간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기에 난 행복할 수 없었고, 결국 나란 사람은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행복해지고 싶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에 행복해 지고 싶다.


지난 40여년간 진단받지 않는 우울증을 앓고 살아온 내 삶을 글로 담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합니다. 글로 자신을 치유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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