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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고백을 받은 후 헤어지자고 했다

아이는 순백의 피부를 가졌다. 어디에 있으나 누구와 있던지 단박에 눈에 띄었다. 유치원에서 아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다. 그리고 아이를 좋아하는 순간부터 확신했다. 걔는 날 절대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확신한 이후 나에겐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좋다는 표시는 절대 내지 않고, 그 사람이 내 근처에 오면 오히려 싫어하는 사람처럼 멀리 도망 다녔다.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6년, 중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다. 서로 알고 지낸 지, 내가 짝사랑한 지 8년째 되던 해 아이는 나에게 선물을 줬다. 다양한 노래가 녹음된 카세트테이프였다. 노래가 다 끝나고 마지막으로 아이의 목소리가 나왔다. 

'나 너 사랑해'


혼자 듣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언니가 갑자기 날 놀리기 시작했다. 

"널 사랑한다고? 하하하 뭘 보고?"


날 놀리는 언니가 싫었고, 나 자신은 더 싫어졌다. 날 사랑한다는 나의 짝사랑 남자아이를 향한 사랑은 강렬한 미움으로 탈바꿈했다. 바로 테이프를 꺼내 뒷마당에 불을 지펴 태워버렸다. 아이를 향한 나의 사랑도 같이 활활 타오르며 잿더미가 되었다.


다음날, 난 아이와 인사도 하지 않았다. 아이의 사랑 고백에 그 어떠한 응답도 주지 않았다. 진짜 사랑을 고백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반응을 할지 친구들과 내기를 해서 나에게 가짜 고백한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남편과는 10년 넘게 장거리 연애를 했다. 밤과 낮이 정반대인 미국과 한국에서 전화통화만으로 사랑의 끈을 이어간 지 6년이 넘는다. 처음 알고 지낸 지 첫 2년간은 완벽한 플라토닉 한 우정을 나눴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 힘들다고 하면 "중학생들은 다 괴물들이야"라며 나를 위로해 줬고, 수업 활동 아이디어가 없다고 고민하면 여러 가지 아이디어도 줬다. 


어느 날, 깨달았다. 이 사람은 내가 먼저 고백하지 않으면 절대로 나한테 고백하지 않을 사람이란 걸. 그래서 마음먹고 이메일로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내가 싫으면 나랑 친구도 할 수 없어요."


남편은 이 같은 나의 고백을 위협으로 느꼈다. 연애를 못해도 친구사이라도 남고 싶었는데, 친구도 못한다고 하니 슬펐다. 결국 남편은 나의 최후통보에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너의 손 편지 글씨를 보고 사랑에 빠졌어. 글씨가 너무 귀엽고 예뼈서."


전화상으로 서로의 사랑을 고백한 이후 난 일주일 간격으로 이별을 통보했다. 직장일로 진 빠지고 힘들 때 나를 제대로 위로하지 못한다고 화내며 헤어지자고 전화를 끊고 매일 오는 전화는 수신차단했다. 그러다가 내가 나를 못 이기고 다시 전화를 걸면 남편은 자기가 미안하다고 전화해 줘서 고맙다고 한다. 이런 비슷한 이별통보는 계속 반복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이 이별통보의 주기가 더 길어졌다. 일주일마다 해대 된 이별은 한 달에 한번, 두 달에 한번, 세 달에 한 번이 되었다. 


결혼하기 전 10년 동안 난 남편에게 내 마음 가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화를 내고 헤어지자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그 모든 순간을 다 참고 이겨냈다. 포기란 자신의 인생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며. 


나를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남편의 말을 난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화를 냈는지 모르겠다. 화를 내서 이 사람의 진심을 테스트한 것이다. "내가 이렇게 세게 나와도 좋아하나 보자!" "이렇게 까지 화를 내고 말을 안 하니 사람 이제 나가떨어지겠지."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렇게 화를 냈다. 

이젠 안다. 남편은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란 걸.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남편은 이 사실을 싫어한다.


"난 네가 자신을 조금 더 사랑했으면 좋겠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다. 남편의 사랑으로 인해 이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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