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도, 자연도 받아주지 않는다면 어딜 가야 하나..
어린 시절부터 나무, 숲, 자연을 좋아했던 저는 훌쩍 떠나고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학창 시절이 고통스러웠던 저는, 그저 모든 걸 내팽개치고 자연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싶었던 욕구가 강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지금도, 마음 한편에 이러한 욕구가 남아있긴 합니다.
아니,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다들 이러한 마음을 하나씩 품고 사는 듯합니다.
귀농, 귀촌을 하시는 분들도 있고,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을 좋아하시는 중장년층 분들도 여러 계시니까요.
이러한 욕구를, 젊은 나이에 실제로 실천한 청년이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존슨 맥캔들리스라는 인물로, 실제로 세상에 존재했던 인물입니다.
<인투 더 와일드>는 이 인물을 바탕으로 만든, 실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명문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미래가 촉망받던 청년이었던 맥캔들리스.
하지만, 그는 속세에서의 이러한 삶에 딱히 관심이 없었는지 훌쩍 자연으로 떠나게 됩니다.
이 여정을 아름다우면서도, 잔혹하게 그려낸 영화가 바로 <인투 더 와일드>입니다.
<나는 자연인이다>를 좋아하시거나, 베어그릴스의 <Man vs Wild> 시리즈 등 자연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영화.
<인투 더 와일드> 리뷰를 간단히 시작해 보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실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기에 결말과 과정은 실존인물 맥캔들리스에 맞춰 정해져 있습니다. 미래가 촉망받는 청년이었던 맥캔들리스는 가정의 불화와 도시에서의 삶에 대한 회의감 등으로 속세의 성공적인 삶을 포기하고 자연에서 살아가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최종 목적지인 알래스카로 들어가기 전에, 맥캔들리스는 여러 지역을 전전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기본적으로 선하고, 성실한 청년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정말 좋아합니다.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만난 사람들마다, 그가 자신들을 떠나지 않고 이곳에 머무르며 삶을 함께 살아가길 원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렇게 만난 인연들은 그저 스쳐 지나갈 인연일 뿐이었습니다.
알래스카라는 최종적인 종착지가 이미 존재하는 그에게는 잠깐 머무를 뿐인 숙소와 같은 곳이었죠.
맥캔들리스의 선한 품성에 반한 이들은, 모두들 그가 정착하길 원했지만 그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품어왔던 이상향을 실천하기 위해 결국 알래스카로 향합니다.
운 좋게, 거주할만한 버스를 발견한 그는 거기서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기 시작하지만, 자연은 그에게 특별한 온정을 베풀진 않습니다.
항상 그래왔던 대로, 그저 묵묵히 흘러갈 뿐인 자연의 흐름은 맥캔들리스에겐 너무나 혹독한 시련이었습니다.
자연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그는, 운 나쁘게 독성이 있는 식물을 섭취하게 됩니다. 여러 날을 끙끙 앓으며 삶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지만, 결국 그는 자연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고 맙니다.
속세의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 인간에게 남는 것은 자연입니다.
자연은 인간과 달리 푸르고, 무한하며,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존재는 아니니까요.
그렇기에, 너무나 매력적이고 마음껏 울며 안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 사랑은 멀리서만 통할뿐입니다. 멀리서 바라본 숲은 한없이 너그러워 보이지만, 다가간 숲은 차가우면서도 적막합니다.
자연은 인간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이 그저 자연을 자신에게 편하게 이용했을 뿐이죠.
저도 예전에는 자연을 좋아했고, 너무나 사랑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맥캔들리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속세의 삶에 적응하기 힘들어서 자연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이긴 하지만, 그것밖에 길이 안 보이는 감정상태가 분명 존재하니까요.
하지만,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다는 말처럼 자연 또한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문명의 이기는, 자연을 어느 정도 정복하고 이용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호사잖아요? 자연은 사람에게 친절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친절하게 만들었을 뿐이죠.
그래서, 저는 맥캔들리스가 조금 더 자연을 이용할 준비를 하고 알래스카로 갔으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월든>을 남긴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도 2년 2개월간의 생활을 할 때, 오두막이라는 주거 공간을 짓고, 농사를 지으면서 안정적인 식량 자원을 확보했기에 건강하면서도 행복한 생활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소로우는 또, 사람을 그렇게 등지지도 않았습니다. 오두막을 찾아오는 자신의 친구와 손님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눈 흔적이 <월든>에서도 드러나거든요.
제 생각에 맥캔들리스가 필요했던 것은 그저 고독과, 자신의 영혼을 숨 쉬게 해 줄 안식처였던 거 같습니다. 그 공간은 속세의 삶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는데, 굳이 차가운 야생의 자연에서 찾으려 했던 게 아쉽습니다.
똑똑하고 성실한 청년이었기에, 조금만 방향을 잘 잡았다면 혼자서 그럭저럭 만족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겼을게 눈에 선명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고독이었는데, 고립을 택함으로써 결국 삶에서도 소외당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정착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죽음이라는 삶의 종착지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자유로운 영혼은,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너무 부자연스럽지 않았나 싶네요.
그렇다고, 그의 용기와 자연에 대한 도전을 폄하하고 싶지 않습니다.
무모하긴 했지만, 그는 분명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에 자신의 선택을 크게 후회하지 않았을 겁니다.
알래스카에서 살아가기로 결심했을 때, 이미 자신의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를 온전히 감당하겠다는 결심이 있었을 테니까요. 그가 후회한 것은 자연에서 살아가기 위한 준비성 부족이었지, 자신의 삶의 방향을 후회하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사람은 역시,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문명의 발전 덕분에, 우리는 "화폐"만 있으면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생필품과 자원들을 구매할 수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물질적인 충족만 채워진 상태를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맥캔들리스처럼, 물질적인 충족이 아니라 정신적인 충족만 이뤄진 것도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두 가지가 모두 충족되어야 인간의 "삶"이 완성되고,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두 가지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나 이외의 "타인"의 존재는 필수입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분명 힘들고 어려운 일이 내 앞을 가로막아 서고, 그럴 때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존재할 때가 있습니다. 아예 다 내팽개치고 도망치고 싶은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순간이 있어서, 대인관계를 놓았고 여러 소중한 친구들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났을 때, 그렇게 놓아버린 내 소중한 인연들이 참 아쉽고 속이 쓰리더군요.
다시는 내 삶으로 되돌려놓을 수 없는 인연들.
그때는 딱히 소중하다고 생각 안했는데, 지나고 나니 참 아쉽고 후회가 됩니다.
아무리, 요즘처럼 물질만능주의가 만행하고 돈이 최고라 하더라도. 이런 비물적인 가치들은 분명 돈보다 훨씬 위에 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기에, 돈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은 자명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혼자 몇 백만원짜리 양주를 마실 바에, 소중한 친구와 소주 한 잔 나누는걸 택할테니까요.
그러니,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립을 자처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맥캔들리스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죽는 그 순간에는 분명 누구보다 차가운 고독과 외로움을 맞이했을 테니까요.
인생에 그런 차가움과 외로움을 택하고 싶은 순간이 올 때는 분명 있지만, 그것은 한순간일 뿐.
우리는 분명 따뜻함과 온정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잠깐의 차가움을 즐기고자, 나에게 지속적인 따뜻함을 주는 인연들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