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빛나는 이유는 태양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INTRO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책에는 폴 오스터라는 작가가 나옵니다.
그 작가분의 인터뷰를 보고 <빵 굽는 타자기>라는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요, 솔직하면서도 물 흐르듯이 읽히는 이 에세이가 너무 재밌었습니다. 그래서, 이 작가분의 소설이 궁금해져서 대표작 하나를 밀리의 서재에서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달의 궁전>입니다.
워낙 옛날 책이라 그런지, 표지가 그렇게 끌리진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전자책으로 읽지만 책의 표지가 예쁘면 괜스레 좋아하는 성격입니다.) 그런데, 책을 펼쳐서 읽는 순간 계속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인칭 시점에서 시작되는 소설을 좋아하긴 하지만, 오랜만에 몰입해서 재밌게 읽은 소설입니다.
지금부터, 왜 이 소설이 재밌었는지를 여러분들에게 간단하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소설의 전반적인 줄거리는 초반에 바로 드러납니다.
포그라는 주인공이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다가, 키티 우라는 여자에게 구출되고 휠체어에 의지한 노인한테서 일자리를 얻고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다가, 유타 주에서부터 캘리포니아 주까지 걸어서 사막을 가로지르기도 한다고 주인공이 나지막하게 독백합니다.
이 여정이 바로 그의 삶의 출발점이 되는데요. 위에서 말한 여정 전체가 작품에서 일어나는 줄거리입니다.
갑자기 스포 한 느낌이 들 수도 있는데, 줄거리를 알고 있다 해서 책의 재미가 반감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주인공 포그 시점에서 흘러가는 이야기의 흐름은 생각한 것보다 더 몰입감이 깊고 술술 읽힙니다.
이 모든 여정은, 주인공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면도날>이라는 작품 속의 래리라는 청년처럼, 주인공 포그도 자신이 살아갈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찾고 싶어 했습니다. 래리보다는 좀 더 광적이긴 했지만요.
이야기의 흐름은 이렇게, 주인공 포그가 독백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흘러갑니다.
1. 주인공의 상세한 내면 독백과 감정상태
나는 위태위태한 삶을 살고 싶었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본 다음, 거기에 이르렀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싶었다.
나는 절망감에 빠져 있었고, 그처럼 큰 격변에 직면해서 어떤 극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나는 세상에 침을 뱉고 싶었다. 할 수 있는 가장 무모한 짓을 하고 싶었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너무 많은 책을 읽은 젊은이의 모든 열정과 이상으로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결정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세상에 적응하고 싶은 생각이 추후도 없었다. 내 동료 학생들이 나를 괴짜로 여기더라도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보기 드물게 지성적이고 다투기 좋아하고 자기주장이 센 미래의 천재,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살금살금 돌아다니는 악의 화신이었다.
<달의 궁전>은 기본적으로, "나"의 시점(주인공 포그)에서 시작되는 1인칭 소설입니다. 제가 1인칭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주인공에게 가장 몰입이 잘되는 시점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 주인공의 감정선이 내가 요즘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면 단숨에 그 소설을 읽게 됩니다. 대리만족이나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죠.
꼭 주인공 시점이 아니더라도, 주인공이 만나는 인물들의 독백과, 그 독백 속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이 굉장히 재밌습니다. 주인공 포그만큼이나, 주인공이 만나는 다른 인물들도 굉장히 특이하고 흥미로운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과거들은 그 인물의 시점에서 또 서술되기 때문에, 몰입감이 깊어지는 것이 <달의 궁전>의 주요 재미 포인트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2. 우연히 일어난 사건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의 흐름이 재밌다!
<빵 굽는 타자기> 책에서 저자 폴 오스터를 간단히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우연의 미학이라고도 불리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문학 체계를 창시했다고 칭송받는 폴 오스터.
그의 작품 중 하나인 <달의 궁전>을 읽으니, 우연의 미학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소설을 읽다 보면 사건의 전개 자체가 좀 논리적이지 않나? 싶은 느낌이 들긴 합니다.
주인공의 행동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이 사건을 억지로 좀 끼워 넣은 느낌?
조력자나 적대자들도 이야기 전개를 위해서 그냥 넣어서 뭔가 수학적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리 플롯이 형식적이고, 어떤 공식이 있다지만 이건 너무 뻔하지 않나 싶은 작품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폴 오스터의 작품은 그런 느낌이 없습니다.
우리가 실제 현실에서 일어나는 어떤 황당한 사건들은 필연이라기보다는 우연인 것처럼, 폴 오스터의 소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도 비슷한 느낌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난데없는 사건이 일어나서 작품이 갑자기 산으로 가거나 어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진짜로 그랬다면, 명작이 아니라 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겁니다.
폴 오스터는 우연과 필연의 그 간극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통해, 양극단의 재미를 잘 살렸다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작품이 예측할 수 없으면서도 즐겁고 재밌습니다. 우연으로 이어지는 이 이야기 전개가 결말까지의 여정을 즐겁게 해 줍니다.
소설 속에서 달은 뭔가 중요한 상징처럼 느껴집니다.
소설의 제목도 <달의 궁전>이기도 하고, 인물들의 대화나 독백 속에서도 달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인간이 달 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그 해 여름이었다."
"저도 그게 이상하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거기에 맞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도서관들은 결국 현실 세계에 있는 게 아니니까요. 거기는 뚝 떨어진 곳, 순수한 생각의 지성소지요. 그런 식으로 저는 남은 삶을 계속 달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태양은 과거이고, 지구는 현재이고 달은 미래이다."
주인공 포그는 평범하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태어나서, 정신적인 방황을 거치게 됩니다.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 토대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방황을 거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포그에게 있어 현실은 그저 지독한 상태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빅터 삼촌이 물려준 책 속의 세계를 탐닉하며 현실에서 도피하려 합니다. 그 결과 포그는 많은 책을 읽어 똑똑하지만, 현실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력은 사라진 사람이 됩니다. 그는 과거와 현재에서 미래로 도망가고 싶어하는 도피자가 됩니다.
태양, 지구, 달이 각각 과거, 현재, 미래로 묘사되는 이유는 그 특성을 은유적으로 비유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의 불우한 가정환경과 과거는 뜨겁고 불우했기에, 태양은 과거로 묘사된 듯합니다.
지구는 당장 살아가는 현실을 맞이하는 공간이기에, 현재라는 시간으로 묘사된 거 같고, 달은 우리가 닿길 원하지만 닿을 수 없으며 어두운 밤을 더 빛내주는 존재이기에 미래로 묘사되는 거 같습니다.
밤이 어두울수록(현재), 달은 더욱 빛나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달은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달빛은 결국 태양에서 나오는 빛입니다.
즉, 과거(태양)가 빛나야만이 미래(달)도 빛날 수 있다는 의미이죠.
그래서, 포그가 과거를 알지 못하고 부정하는 순간에는 그에게 달빛은 큰 의미가 없으며 삶이 시작되지도 않습니다. 그가 달빛을 진정으로 마주하게 되는 순간은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되면서 부터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빛나는 달을 제대로 마주하게 되거든요.
포그에게 달은 미래이자, 현재에서 도망치기 위한 도피처였습니다. 하지만, 과거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그 과거를 해결하지 않는 한, 달이라는 낙원으로 도망친다 하더라도 분명 그 달빛을 볼 수는 없을 겁니다. 태양을 등진 사람이 어떻게 태양 덕분에 빛나는 달빛을 볼까요? 태양을 부정하는 사람은 달빛도 부정할 수 밖에 없으며, 태양과 달빛을 부정한다면 결국 지구도 부정하는 셈입니다.
모든 것을 부정한 이는, 결국 장님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빛이 있어야 현실을 보고 살아갈 수 있는 법인데 그 빛을 부정한다면 삶은 빛나지 않을 것입니다.
내 삶이 빛나지 않고 어두컴컴하다면, 어쩌면 내 일부인 과거를 부정하고 있어서가 아닐까요? 꼭 과거가 아니더라도 내 안의 태양(열정, 꿈 등)을 부정해서 그런 걸지도 모릅니다. 빛나는 달은 태양덕분인 것처럼, 달빛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뜨거운 태양을 견뎌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달의 궁전>은 전반적으로 이야기가 정말 물 흐르듯이 흘러갑니다. 갑작스럽게 이야기가 급전개되더라도, 그것이 역류처럼 느껴지지도 않고 원래 당연히 그렇게 흘러야 하는 것처럼 흐릅니다. 분명 모든 사건과 이야기들은 작가가 필연적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장치일 텐데도, 우연처럼 느껴지는 이 흐름은 "미학"이라고 불릴만한 것 같습니다.
소설을 그저 재밌는 이야기를 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달의 궁전>은 이러한 소설의 정의에 가장 잘 부합하는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두운 밤보다는 달빛이 빛날 때 읽으시면 더욱 재밌지 않을까 싶네요.
이상으로 소설 리뷰를 마칩니다.
다음에도 더 재밌는 리뷰로 찾아뵙겠습니다.